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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마지막까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2)

 

1908년 하버드 철학자 조시아 로이스는 ‘충성심의 철학’이라는 책을 펴냈다. 로이스 교수는 나이들면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유한성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느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삶이 가치있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더 무엇이 필요할까? 로이스 교수는 스스로 대의를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것을 인간 본연의 욕구로 보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대의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위해 희생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점이다로이스는 인간에게는 충성심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주장했다. 충성심이 필연적으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삶을 견뎌내기 위해 자신을 넘어선 무언가에 헌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러지 않을 경우 우리는 덧없고 변덕스럽고 만족을 모르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아갈 뿐이다. 그것은 결국 고통만 안겨줄 뿐이다.  ‘나는 본래 수없이 많은 조상들의 기질이 합류한 만남의 장소 같은 존재다. 시시각각... 나는 충동의 집합체이다.

 

결국 죽을수 밖에 없는 사실은 그저 공포로 다가올 뿐이다. 그러나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믿음이 있다면 죽음은 단지 끔찍한 공포로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로이스는 자아실현 단계보다 더 위에 초월 단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에게는 다른 존재가 잠재력을 성취히도록 돕고자 하는 초월적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모두 단순한 기쁨이 주는 안락함을 찾게 된다. 동료애와 우정, 규칙적인 일상, 맛있는 음식, 얼굴에 와 닿는 햇살의 온기 같은 것 말이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성취하고 축적하는 것보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에서 얻는 행복감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야망이 줄어드는 걸 느끼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남기고 갈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산다는 것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느끼도록 해 주는 목적을 우리밖에서 찾고자 하는 깊은 욕구를 가지게 된다.

 

토머스가 내게 말했다. ‘사람들이 살아나는게 보였어요. 그들이 세상과 상호작용하기 시작하고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이고, 웃기 시작한 것을 목격한 겁니다. 보통 짜릿한 느낌이 아니지요.’ 그리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의학이 만들어낸 기관들이 삶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드는게 무언지를 두고 잘못된 관심을 가져 왔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아예 관점자체가 부재한다는 사실이다. 의료전문가들은 마음과 영혼을 유지하는게 아니라, 신체적인 건강을 복구하는데 집중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이 기울어가는 마지막 단계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의료전문가들에게 맡겨버렸다. 인간의 욕구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 기술적인 전문성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우리 운명을 맡기는 일종의 사회공학적 실험이었다. 우리가 삶에서 추구하는게 안전과 보호일 뿐이라면, 다르게 결론 내릴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가치와 목적이 있는 삶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환경을 제공받지 못했다. 

 

토머스는 사람들에게 돌봐야 하는 생명을 주는 것으로 첫발을 디뎠고, 윌슨은 잠글수 있는 문門과 자신만의 부엌을 주었다. 두사람의 프로젝트는 상호보완적이었고, 노인을 돌보는 일에 관련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어시스티드 리빙요양원은 각 단위를 가구라고 불렀고, 실제로 한 가구의 기능을 했다. 각 가구는 인간적인 규모였다. 바로 그것이 이 시스템의 핵심 개념이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20명 미만 단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불안이나 우울증세를 경험하는 빈도가 적으며, 더욱 사교적이 되고, 친구 관계를 만들기도 쉬워진다고 한다. 또 안전하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믿고, 직원들과의 상호작용도 더 원활해진다. 내가 만난 직원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다른 요양원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신념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의 요양원에서였다면, 안전을 위해 휠체어를 사용하고 있었을 할머니가 걸어다니는 것을 허용했다. 물론 위험이 따르는 일임이 분명했다. 그곳 직원들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고 있었다.

 

'혼자서 화장실을 갈 수 있다는게 얼마나 행운인지 몰라요'.  로다 할머니가 내게 말했다. '별게 아니라고 생각 할지 모르겠네요. 젊으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이 바로 혼자 화장실에 갈수 있는 거라는 것을 늙어보면 알게 되요'. 할머니는 몇 년전까지만 해도 자기 아파트에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 좌골신경통이 생겼고, 낙상이 잦아졌고, 시력을 잃어갔다. 그래서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거기서는 가구와 애장품과 자기 것을 모두 잃었고, 다른 사람과 방을 함께 쓰면서 엄격한 일과를 지켜야 했으며 십자가가 머리 위에 걸린 침대에서 잠을 자야 했다. 나는 유대인이라 십자가를 그리 좋아하지 않죠. 루스할머니가 바라는 것은 소박했다. 그녀는 규칙적인 일상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느긋한 아침 식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로비에서 친구들과 나누는 수다, 딸과 하는전화통화, 오후에 즐기는 낮잠 같은 것들 말이다.

 

1983년 지역주민들중 독립생활이 가능한 저소득층 노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정부보조를 받는 73개의 아파트로 구성된, 피터 샌본 플레이스를 운영하는 재키 카슨은 지역 알선업자를 통해 가사도우미를 구해서 빨래, 청소, 정보기 등을 돕도록 했다. 공식적으로는 저소득층 노인을 위한 아파트단지일 뿐이지만, 무슨 일이 있든지 간에 노인들이 자기 집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끝까지 살도록 돕겠다는 결의에 차있는 원장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차이일 뿐이었다. 카슨은 여든다섯된 루스 할머니가 그 집에서 11년째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울혈심부전과 만성폐질환 때문에 산소가 필요했고, 관절염과 불안정당뇨의 합병증으로 4년동안 걷지 못했다. 카슨은 점차적으로 구급차 서비스센타, 병원 등과의 관계를 다져나갔다. 주민들의 치료과정을 샌본플레이스와 상의하고 치료가 끝나면 안전하게 돌려보내주기를 바란다는 점을 이해시킨 것이다. 카슨은 어느날 자기가 만난 알츠하이머병이 있는 아흔세살 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는 충분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친구가 있고 무엇보다 익숙한 환경에 있었다. 나는 카슨에게 그녀의 철학이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고 했다. 심신이 어떤 상태에 있든 간에 주민들이 계속 해서 자기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철학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할수 있을 것이다. 피해야할 장애는 모두 피하고, 극복해야할 장애는 모두 극복할 거예요. ’ 그녀는 무슨 포위공격을 모의하는 장군처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