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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치료만이 전부가 아니다(3)

우리는 지금도 저물어 가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편안한 일상을 보낼수 있게, 곁에 있는 누군가와 마음을 나눌수 있게, 그리고 그저 수수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어시스티드 리빙이라는 개념이 인기를 끌자 개발업자들이 아무데고 이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명칭을 사용하려는 욕구가 커지면서 어시스티드 리빙은 온갖 곳에서 가져다 쓰는 이름이 되었다.  윌슨이 당초의 설립 철학을 지켜내려 해도 그녀처럼 확고 하고 충실하게, 그 개념을 따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시스티디 리빙은 독립주거공간으로부터 요양원으로 가는 과정에서 잠깐 경유해 가는 곳이 되는 경우가 가장 많아졌다. 2003년 1500개의 어시스티드 리빙시설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요양원에 대한 대안으로 시작된 어시스티드 리빙 개념은 거의 소멸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윌슨회사 이사회 마저도 그녀의 철학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많은 기업들이 운영하기 쉬운 데다 돈도 덜 드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노인들이 요양원 가는 것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소도시에 좀 더 작은 규모의 시설을 짓고 싶어했다.

 

처음에 셸리는 아버지가 겪고 있는 문제가 어느 정도는 그저 변화에 대처하는게 어려워서 생긴 일이라고 느꼈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루 할아버지는 변화를 반기지 않았다.  셸리의 마음을 가장 불편하게 한 것은 직원들의 무관심한 태도였다. 그들은 루 할아버지가 삶에서 관심을 기울여온 것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곳에 옴으로써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이 무엇인지, 전혀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다시말해 그들은 삶에서 할아버지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와 기쁨을 어떻게 하면 유지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려 하지 않았다. 루 할아버지와 셸리는 타협점을 찾았다. 셸리가 아버지를 일요일마다 집으로 모시고 와서, 화요일에 모셔다드리기로 한 것이다. 루 할아버지에게는 매주 기대할 일이 생겼고, 셸리에게도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윌슨은 어시스티드 리빙시설이 실패로 끝나는 이유를 이야기 했다. 우선 사람이 잘살아가도록 진심을 다해 돕는 일은 말로 하는 것보다 실제로 하기가 훨씬 힘들다. 그리고 돌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실제로 어떤 일을 수반하는지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어렵다. 그녀는 옷 입는 것을 돕는 경우를 예로 들었다. 이상적으로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 그래야만 남아있는 신체능력을 유지할 수 있고 독립적인 느낌을 가질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옷을 입혀주는게 스스로 입게 끔 놔두는 것보다 쉬워요. 시간도 덜 걸리고 서로 마음상할 일도 적어지지요 '

 

그래서 노인들의 신체능력유지를 우선시 하지 않을 경우, 직원들은 노인들이 마치 헝겊인형이라도 되는 듯 옷을 힙힌다. 그리고 점차 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서서히 내리막 길을 걷게 된다. 해야할 일이 사람보다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어시스티드 리빙이라는 개념, 즉 일상적인 삶을 돕는 일의 성공여부를 잴수 있는 척도가 없다는 점이다. 반면 위생과 안전에 대해서는 굉장히 엄밀한 평가기준이 있다. 시설에 들어가 있는 우리 아버지가 외롭지 않은지 하는 것보다 체중이 감소했는지, 약은 빼먹지 않은지, 넘어지지는 않은지 등을 더 중히 여기는 것이다. 윌슨은 가장 실망스럽고 중요한 문제가 따로 있다고 말한다. 바로 어시스티드 리빙시설이 노인들을 위해서 라기보다,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노인들이 어디서 살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대개 자녀들이다. 시설들이 고객유치를 위해 주안점을 두고, 고급호텔 느낌의 아름다운 현관을 만들고 컴퓨터 시설, 운동시설, 음악회 등을 강조한다. 이 모든 게 중년에 이른 자녀들이 부모를 위해 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것들이다. 부모들이 해주기를 원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우리가 애정을 가지고 행하는 일들이 정작 당사자 자신은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윌슨은 이렇게 된데는 일정부분 노인들 탓도 있다고 말한다. 노인에게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어요. 의사결정권을 자녀에게 나눠주거든요. '자, 이제 너에게 책임을 맡길께' 하는 식인거죠.  하지만 '이곳이 우리 엄마가 원하는 혹은 좋아하거나 필요로 하는 곳일까?'하고 생각하는 자녀는 드물어요. 그보다 자신의 눈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지요. 자녀는 스스로 이런 식으로 묻는다는 것이다.  ‘ 이곳에 엄마를 맡겨도 내 맘이 편할까?’ 루 할아버지가 어시스티드 리빙시설에 들어간지 1년이 지났다. 아흔두살 나이에도 자신의 일상을 만들어 갔다. 그러나 그의 몸이 협조를 하지 않았다. 걸어다니다가도, 침대에서 일어나다가도 밤낮 없이 정신을 잃곤 했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도 않았고, 기억력도 점점 나빠져 갔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방에 앉아지냈다. 딸은 아버지를 24시간 돌볼 수 있는 곳으로 옮겨야 할 것 같았다. 아버지 안전을 생각해야 했다. 딸은 아버지가 가장 두려워 하는 곳에 아버지를 보내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느꼈다. 모두 사랑과 헌신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선택권을 준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더 행복한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처럼 기댈 곳이 있는 대가족이 함께 지내면서 그가 선택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게 지속적으로 돕는 시스템이 부재한 경우, 우리 사회의 노인들은 통제와 감독이 계속되는 시설에 걷혀사는 수밖에 없다. 풀수 없는 문제에 대해 의학적으로 고안된 답이고 안전하도록 설계된 삶이지만, 당사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하나도 없는 텅 빈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