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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인간다운 마무리를 위한 준비(1)

통찰이란 바로 노화나 질병으로 인해 심신의 능력이 쇠약해져 가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면, 종종 순수한 의학적 충동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너무 깊이 제어 해서 고치고 제어하려는 욕구를 참아야 한다는 뜻이다. 내 환자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여기서 아주 어려운 문제는 고치려 애써야 할 때는 언제고, 그러지 말아야 할 때는 언제일까? 만일 우리가 전이암 혹은 그와 비슷한 불치병으로 생이 얼마남지 않은 상황이라면, 의사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랄까? 이 문제는 최근들어 종종 비용문제로 주목받게 되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의료비는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장기적 재정 안정성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으로 떠올랐는데, 그중 상당액이 불치병을 관리하는데 쓰인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에서는 메디케어 비용의 25%가 생의 마지막 1년에 접어든 5%의 환자에게 사용되었고, 또 그 가운데 대부분은 거의 아무런 효과가 없는 최후 1-2개월에 집중된 것이다. 암이 생명을 위협할만큼 치명적인 것으로 판명될 경우, 치료비용은 U자곡선을 그리며 말기에 증가하는 양상을 보인다. 전이성 유방암 환자가 마지막 1년에 들이는 비용은 평균 9만4000달러이다. 현대의학은 한달에 1만 2000 달러가 드는 화학요법, 하루에4000달러짜리 집중치료, 한시간에 7000달러 짜리 수술 등으로 죽음을 미루려 애쓰는데 능하다. 결국 죽음은 오고야마는데도 어느 시점에 치료를 멈추어야 할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이 여든에 가까운 할머니는 치료불가능한 울혈심부전을 앓고 있었다. 3주만에 두번이나 중환자실에 입원한 할머니는 인사불성이 될 만큼 약을 투여 받았고 몸에 난 구멍이란 구멍에는 모두 관이 꼽혀 있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인공으로 낸 몇개의 구멍에까지 관이 꼽혀 있었다. 나이 일흔살의 또 다른 환자는 폐와 뼈에 암이 전이된 상태였는데, 환자 자신은 더 이상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암주치의가 설득하여 생각을 바꾸도록 했다. 2008년 ‘암에 대처하기’라는 프로젝트에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암환자가 기계적 인공호흡, 심폐소생술, 심장압박 치료 등을 받거나,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중환자실에서 집중 치료를 받았을 경우, 인위적 개입을 받지않은 사람보다 마지막 일주일 경험한 삶의 질이 훨씬 나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자가 사망한 후 돌봤던 사람들이 심각한 우울증을 겪을 확률도 세배나 높았다. 말기 질환으로 생의 마지막 날들을 중환자실에서 보내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일종의 실패로 간주한다.  이곳에서 환자들은 몸의 각 기관이 하나씩 멈추고 정신은 오락가락 하며, 형광등이 켜진 이 낯선 방을 절대 살아서 떠날 수없으리라 것조차 모르는 상태로 인공호흡기에 매달린 채 누워지낸다.  ‘괜찬아’ ‘미안해’ 혹은 ‘사랑해’같은 말로 작별인사를 할 기회조차 없이 마지막을 맞는 것이다.

 

심각한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 말고도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많다. 조사해 보면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고통을 피하고,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고, 주변상황을 자각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잃지 않고,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 자신의 삶이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기술에 의존한 의학적 처치는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실패했다. 과거에는 보통 죽어간다는 것이 급격하게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경험이었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부분 자신이 생명을 위협하는 병에 걸렸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를때까지 며칠에서 몇주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별 경고없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사람들이 할수 있는 일은 이겨내거나, 무릎을 끊거나 둘중 하나였다. 오늘날 비참한 질병에 걸려 갑작스럽게 죽음에 이르는건 예외적인 일이 되었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멈출 수 없는 상황이 올때까지 오랜 의학적 투쟁을 벌인 끝에 죽음을 맞이 한다. 말기암, 치매, 파킨슨병, 정기부전(심장, 폐, 신장, 간 등) 혹은 너무 나이들어 나타나는 노환의 축적 등으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이 모든 경우의 마지막 단계가 죽음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시기는 확실치 않다. 우리 모두는 이 불확실성과 싸우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전투에서 패배 했다는 걸 언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두고 싸우는 것이다.

 

지난 몇십년 사이, 의학은 죽음에 관해 수백년 동안 내려온 경험과 전통, 표현들을 더 이상 쓸모없게 만들어 버렸고, 인류에게 새로운 문제를 안겨 주었다. 바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환자가 호스피스 케어를 받게 하려면, 앞으로 6개월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서류에 담당 의사가 서명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환자가 자신의 병이 말기에 이르렀음을 이해하고 있으며, 병을 치료하기 위한 의학적 노력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내는 서류에 서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호스피스 하면 떠 올리는 것이 모르핀 주사이다. 일반적인 의료행위와 호스피스 케어의 차이점은 치료하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에 있는게 아니라,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보통 의료행위는 생명 연장에 목적을 두고 있다. 지금 당장은 수술, 화학요법, 중환자실 입원 등으로 삶의 질을 희생하게 되더라도 시간을 좀 더 벌수 있다면, 그렇게 한다. 호스피스 케어는 간호사, 의사, 성직자, 사회복지사 등을 동원해서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수 있도록 돕는다. 질환이 말기에 이르렀다면 불편함과 통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고, 가능한 한 오래 의식을 유지할 수 있게 하고, 가끔은 가족과 외출할 수 있게 돕는 것과 같은 목적에 초점을 맞춘다.

 

호스피스로 오는 사람들 중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은 4분의 1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99%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이해하지만 모두 다 자신은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는다. 여전히 병을 이기고 싶어한다. 데이브와 아내 섀런은 보스턴 소방대원이었고 세살된 딸이 있었다. 그는 췌장암에 걸렸고, 다른 부위로 전이된 상태였다. 호스피스팀은 진통제 펌프를 설치하고, 섀런은 24시간 대기중인 호스피스 간호사에게 전화하여 어떤 약을 써야 할지 지시받을 수도 있었다.  데이브와 섀런은 밤새 깨지 않고 잘 수 있게 되었다. 데이브 부부는 두사람이 좋아하는 식당에서 외식까지 했다. 데이브는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그 식당에 얽힌 추억들에 잠길 수 있었다. 섀런이 가장 어려웠던 일은 영양공급을 포기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데이브의 몸에서 영양을 전혀 흡수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당, 단백질, 지방이 섞인 액체가 몸에 들어가서 피부가 아프도록 부풀어 오르고 숨도 더 가쁘게 했다. 이 모든 고통을 무엇을 위해 감수해야 한다는 말인가?  호스피스 케어의 정신은 지금 이 순간을 산다는 것이 아닌가?  영양 공급을 중단하면 남편을 굶어죽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느껴졌지만, 영양공급을 중단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에 오히려 붓기가 빠지고, 음식도 몇모금씩 먹기 시작했다. 섀런은 자신의 결정을 더 마음 편하게 느꼈다. 데이브는 일주일 후에 숨을 거두었다. 집에서 평화롭게, 가족에 둘러싸인 채 말이다. 호스피스 케어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려고 시도해 왔다. 모두가 그 절차를 받아들여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호스피스 케어를 수용한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아르스 모리엔디'(죽음을 슬기롭게 맞이 하는 방법)를 만드는데 일조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많은 장애가 존재한다. 고통뿐 아니라 멈출수 없어 보이는 의학적 치료 행위의 관성에도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