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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무엇인가(수전 울프, 박세연

논평(( 노미 아르팔리, 조너선 하이트)

 

인간을 원숭이와 구분하는 다양한 기준중에서도 본질을 추구하는 성향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특성이다.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동기가 '자기이익과 도덕적 의무'라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두 범주에만 국한돼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진실과 아름다움, 각종 스포츠 등 자신이 좋아하는 다양한 분야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정상적인 성인이 우정, 사랑, 섹스, 소속감, 놀이 등 일상적 친밀감과 같은 다양한 인간적 교류가 전혀 없는 삶에서 진정으로 만족감을 느낄수 있을까? 학습을 통한 만족감이나 기량의 발전에 따른 성취감, 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거나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만한 행동에 따른 뿌듯함을 전혀 겅험하지 못했다고 해보자. 그의 삶은 기본적인 감성적 요구와 지극히 일반적인 욕구까지 전혀 충족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다. 그런데도 스스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의심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힘든 일은 어떻게든 피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울프교수는 삶의 의미를 하나의 가치와 동기로서 즉 도덕적 의무 및 자기이익이라는 미심쩍은 일반 범주와는 다른 제3의 범주로서 제사하고 있다. 그리고 삶의 의미에 따라 행동하는 사례로 예술적인 열정 그리고 수 많은 대상에 대한 사랑을 들고 있다.  예술적인 열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술 그 자체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울프 교수가 삶의 의미를 특별한 지위를 지닌 가치라고 주장한다면, 삶의 의미 그리고 하나의 가치로서 아내 또는 하나의 가치로서 예술 등과의 사이에서 그 관계를 명확히 밝혀야 할 것이다. 도덕성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반드시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신중함의 관점에서 볼 때, 항상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가치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가치가 충돌할 때 사람들은 각자 스스로 판단을 내린다. 이 말은 곧 각각의 모든 가치들을 초월해 우리에게 어떤 선택이 옳은지 분명하게 말해주는 상위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러가지 열정들이 서로 충돌할 때 어떤 열정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열정의 대상에 나의 관심 및 바람과는 무관한 객관적인 가치가 존재하는지 확인하게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나의 경우는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고, 철학공부가 도움이 될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돌아온 건 좌절 뿐이었다. 철학은 존재와 지식에 대한 다양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었지만, 정작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삶에서 아주 많은 것을 이뤄낸다. 디자인하고, 쓰고, 짓고, 키우고, 치료하고, 발견하고 투자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책이 나올 정도로 인류의 지성이나 행복에 기여한다. 대부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자신의 일에 열정을 다한다. 그런데 우리 모두 궁금해하는 것이 하나있다. 그들은 어떻게 그런 길로 들어섰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나도 그들의 뒤를 따를 수 있을까?

 

칙센트미하이 교수가 말하는 '몰입'이란 어렵지만, 최선을 다해 해낼 수 있는 어떤 일에 완전히 빠져있는 동안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심리적 상태를 의미한다. 몰입은 개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깊은 관심을 뜻한다. 많은 것을 이루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깊은 관심으로 삶의 여정을 이어간다. 울프 교수의 수정된 성취관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표현은 이것이다. 삶의 의미는 가치 있는 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관여 과정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적극적인 관여로 세상과 관계를 형성 한다고 설명하면서 울프 교수는 나의 중대한 관여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시에 그녀는 그 활동에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함으로써, 객관적인 측면도 강조하고 있다.울프 교수는 객관적인 가치의 존재를 믿고있다. 나는 객관적인 가치와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어떤 활동이 삶의 의미를 가져다준다고 말하기 위해서, 반드시 주체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음으로 울프교수는 엘리트주의의 위험을 제기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외부관점에서 어떤 활동이 가치 있다거나, 열정을 바칠만한 대상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묻고 있다.

 

동물중 많은 종은 사회적이며, 그 중에서 특히 몇몇 종은 초사회적이다. 초사회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수많은 개체들로 이루어진 집단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광범위한 노동분화와 더불어 집단을 위해 희생하며 심지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고 의지를 갖고 살아가려는 성향을 의미한다가장 초사회적인 동물로는 벌, 개미, 벌거숭이 두더지쥐가 있다. 이들은 모두 여왕이나 단일 왕족 부부를 통해서만 번식을 하는 사회에 씨족원으로 참여함으로써 초사회성의 본능을 발현 한다. 이는 '모두를 위한 하나이, 하나를 위한 모두'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바로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벌떼를 초유기체로 보는 것이다.  우리는 각각의 벌을 하나의 거대한 신체를 이루는 세포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여왕벌은 사실 두뇌가 아니라 난소기능을 담당한다. 반면 침팬지는 사회적이기는 하지만, 초사회적 종은 아니다. 이들은 기꺼해야 몇십마리 단위로 집단을 이루며 살아간다. 그리고 동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 음식을 나누어 먹는 법도 없다. 우리 인류는 진화를 통해 침팬지의 미약한 사회성으로부터 오늘날 살아가고잇는 초사회성의 단계로 도약했다. 인간은 친족관계로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거대한 범위로 집단을 이루며 살아간다.

 

맥닐은 우리 사회는 춤이나 행진, 제식이나 노래 등 똑같은 동작으로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의식을 기반으로 사회적 초유기체를 창조함으로써, 구성원들 자아의 벽을 허물고 더 거대한 몸의 세포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희열과 에너지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오늘날 인류는 계몽주의 이후로 벌집을 뛰쳐나온 , 그리고 20세기를 거치면서 결국 마지막 남은 벌집까지 몽땅 태워버린 벌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진정한 벌집이 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자아보다 훨씬 더 큰 규모가 필요한 것이다. 현대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주요한 과제중 하나는 인류를 위한 새로운 벌집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