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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E.H. Carr, 김택)

역사에서의 인과관계(2)

누구나, 언제든지, 역사에서 그랬을지도 모를 것을 가지고 퀴즈놀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결정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역사란 전체적으로 우연의 계속이라는 즉 우연의 일치에 의해서 결정되고, 가장 뜻밖의 원인에서만 유래하는 사건의 연속이다. 악티움 해전의 결과도 역사가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그런 종류의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얼이 빠진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후관계가 그것과는 다른 전후관계에 의해서, 게다가 우리의 견해로 볼 때는 아무 연관성도 없는 전후관계에 의해서, 언제라도 분쇄되거나 굴절되기 쉬울 때, 우리는 어떻게 역사에서 원인과 결과의 일관된 전후관계를 발견하고, 또한 어떻게 역사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어떤 일이 불운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원인을 탐구할 때 귀찮은 의무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즐겨 쓰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역사는 우연의 연속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가 지적으로 게으르다거나, 지적인 활동력이 저급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원인은 역사 과정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을 결정하며, 그의 해석은 원인에 대한 그의 선택과 배열을 결정한다. 어느 하나의 원인이나, 어느 일련의 원인 혹은 또다른 일련의 원인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가려내는 것이 그의 해석의 핵심이다. 최근에 어느 인기 작가는 과학의 성과들에 관해서 이야기 하는 가운데 인간의 정신과정을 그럴듯하게 묘사했는데, 인간의 정신은 관찰된 사실들 중에서 부적당한 것은 버리고 적당한 것은 골라내어 그것들을 이어붙이고 본을 떠서, 비로소 지식이라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누비이불로 꿰맨다는 것이다.

 

평상시에 음주량 이상을 마시고 파티에서 돌아오고 있던 존스는, 거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컴컴한 길 모퉁이에서, 나중에 브레이크 결함이 있는 것으로 판명된 차로 로빈슨을 치어 죽였는데, 로빈슨은 마침 그 길 모퉁이에 있는 가게에서 담배를 사기 위해 길을 건너고 있던 중이었다. 혼란이 수습된 후에 우리는 모여서 그 사건의 원인을 조사하게 된다. 그 원인은 그것은 운전자가 반쯤 취한 상태 때문인가? 아니면 결함이 있는 브레이크 때문인가? 아니면 컴컴한 길모퉁이인가? 우리가 이러한 실제적인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동안, 두 사람의 유명인사가 방으로 불쑥 들어와, 우리에게 만일 그날 밤 담배갑에 담배만 있었던들 로빈슨은 그 길을 건너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로빈슨이 담배를 피우고 싶어하는 것이 죽음의 원인이었던 것이었다. 이 원인을 무시하는 모든 조사는 시간 낭비가 될 것이며, 그런 조사에서 이끌어낸 어떠한 결론도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것이라고 설득력있게 말한다. 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역사란 '역사적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선택과정이다. 역사가는 끝없는 사실의 바다에서 자신의 목적이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수한 인과적 전후관계 중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을, 오직 그런 것만을 추출해 낸다. 그리고 그 역사적 중요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그 전후관계를 자신의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의 모형에 짜맞추는 역사가의 능력이다‘법철학 서문’에 나오는 헤겔의 격언 이런 말이 있다. ' 합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합리적인 것이다.‘ 원인들중 어떤 것들은 합리적이며, 현실적이라는 것, 그리고 다른 원인들은 비합리적이며 우연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나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그렇게 구별 했을까? 이성적 사고의 능력은 보통 '목적'을 위해서 발휘된다. 지식인들은 이따금 재미삼아 사고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말하자면, 인간은 어떤 목적을 향해서 사고한다. 그러므로 어떤 설명들은 합리적이라고 인정했고, 다른 설명들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인정했다면, 우리는 일정한 목적에 기여하는 설명들과 그렇지 못한 설명들을 구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합리적인 원인은 다른 나라, 다른 시기, 다른 조건에서도 언젠가 적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결국 유익한 일반적인 원인이 되며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키고 심화시킨다. 우연적인 원인은 일반화 될 수 없다. 어떠한 교훈도 가르쳐주지 않으며, 어떠한 결론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우리가 역사에서 인과관계를 다루는 데에 열쇠를 제공해주는 것은, 바로 이렇듯 어떤 목적이 고려되고 있는가 하는 관념이다. 그리고 이 관념은 필연적으로 가치판단을 포함한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가르는 상상적인 분할선으로 일종의 관념적인 실재에 불과하다. 과거와 미래는 동일한 시간대의 일부이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관심과 미래에 대한 관심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쉽게 설명 되리라고 생각한다. 역사 이전시대와 역사시대 사이의 경계선은 사람들이 더 이상 현재 속에서만 살려고 하지 않고, 그들의 과거와 그들의 미래 모두에 의식적으로 관심을 가지게될 때 무너지게 된다. 역사는 전통의 계승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전통은 과거의 관습과 교훈을 미래로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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