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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E.H. Carr, 김택)

진보로서의 역사

나는 신비주의란 역사의 의미를 역사 밖의 어딘가에서 즉, 신학이나 내세론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견해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어딘가를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목적론적 역사관을 도입한 것은 유대인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기독교도들이었다. 역사의 목적에 도달한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역사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 자체가 일종의 신정설이 되었다. 이것이 중세의 역사관이었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세계와 이성의 우위라는 고전적 견해를 복원시켰다.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주의자들은 유대-기독교적인 목적론적 견해를 견지했지만, 그 목적을 세속화시켰다. 역사는 지상에서 인간세계의 완성이라는 목적을 향해서 진보하는 것으로 변했다.

 

진보의 이념을 쓴 베리는 진보를 서유럽문명을 활기차게 만들고, 그것을 지배하는 이념이라고 서술했다. A.J.P. 테일러는 문명의 쇠퇴에 관한 지금의 모든 이야기는 그저 대학 교수들이 옛날에는 하인을 부렸는데 이제는 직접 설거지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고 말했다. 물론 옛날의 하인들에게 교수들의 설거지는 진보의 상징일 수 있다. 진보의 개념에는 무엇이 함축되어 있는가? 첫째 나는 진보와 진화에 관한 혼란스러운 생각부터 제거하고 싶다. 자연을 진보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어떤 목적을 향해서 전진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데에는 어떤 근거가 있었던가?   다윈의 혁명은 진화와 진보를 동일시함으로써 모든 혼란을 제거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연도, 역사도 마찬가지로 결국 진보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5천년전의 조상보다 현대인의 두뇌가 더 크지도 않으며, 타고난 사고능력이 더 큰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 동안의 여러 세대의 경험을 습득하여 그것을 자신의 경험에 합체시킴으로써, 사고의 유효성을 몇배 증가시켜 왔다.  역사란 획득된 기술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승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진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진보에 일정한 출발점이나 종점이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문명의 탄생을 진보라는 우리의 가설의 출발점으로 삼으려고 할지 모르겠으나,  문명은 결코 어떤 발명품이 아니라  아마도 때때로 발생했을 극적인 비약이 수반된 무한히 점진적인 발전의 과정이었다. 역사의 내용은 우리가 역사를 경험해야만 현실화될 수 있다.

 

세번째 논점은 분별있는 사람이라면 역전과 일탈과 중단없이 곧장 일직선으로 전진한 그런 종류의 진보를 결코 믿지 않았다는 것, 따라서 가장 급격한 역전조차도 반드시 그 믿음에 치명타를 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보의 시기뿐만 아니라 퇴보의 시기도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가 역사에서 관찰할 수 있는 진보는그 어떤 것이든 시간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확실히 연속적이지 않다는 주목할만한 사실을 시사한다. 그리고 어느 한 집단에게는 쇠퇴의 시기로 여겨지는 것이 다른 집단에게는 새로운 전진의 시작으로 여겨질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진보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고 동시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의미할 수도 없다. 만일 우리가 진보라는 가설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길은 중단되기도 한다는 조건을 반드시 인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역사적 행위의 측면에서 진보의 본질적인 내용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시민적 권리를 위해, 형사소송 절차 개혁을 위해, 불평등을 제거하기 위해....  어떤 역사적 법칙이나 진보라는 가설을 실현시키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행위를 진보라고 해석하는 사람은 바로 역사가이다. 인간의 선조들이 경험을 통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그리고 역사에서의 진보는 자연에서의 진화와는 달리 획득된 자산의 계승에 의존한다는 것은 역사의 한 전제이다.  그 자산에는 물질적인 재산과 자신의 환경을 정복하고, 변형하고, 이용할 수 있는 능력, 이 두가지가 모두 포함된다.

 

오늘날 물질적 자원과 과학적 지식의 축적에서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또한 기술적인 의미에서 환경에 대한 지배력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의문시 되는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우리 사회상태에서 과연 어떠한 진보가 있었는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진화는 기술의 진보에 비해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뒤쳐져버린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 즉 대륙, 민족, 계급 간의 세력 균형의 변화가 낳은 충돌과 격변의 이 시대는 그러한 능력과 자질을 점점 더 크게 위축시켜 왔고,  그것들이 발휘해야 할 적극적인 성취효과를 제한하고 차단해 왔다. 인류가 추구하는 그 구체적인 목록들은 그때그때마다 역사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역사 밖에 있는 어떤 원천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도 역시 해석이라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때 중요한 것과 우연한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중요성에 관한 대로의 기준이 필요하며, 그 기준은 또한 그의 객관성의 기준이기도 하다.  역사의 방향 감각만이 우리가 과거의 사건을 정리하고 해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며, 미래 전망을 갖고서 현재의 인간 에너지를 분출시키고 조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의 방향 감각, 즉 과거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우리가 전진함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되고 발전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역사가를 객관적이라고 말할 때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역사가 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로 인해서 제한 되어 있는 시야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둘째로 역사가에게는 자신의 시야를 미래에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런 만큼 그는 자신이 처해있는 바로 그 위치에 전적으로 속박된 사고방식을 가진 역사가들보다 과거에 대해서 더 심원하고, 더 지속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는 미래의 이해에 다가설 때만 객관성에 접근할 수 있다. 역사가의 과거에 대한 해석, 중요한 것과 적절한 것에 대한 선택은 새로운 목표들이 서서히 출현함에 따라서 발전하게 된다. 한 시대에 적합했던 것이 다른 시대에는 파격이 되었고, 또한 그 때문에 비난받고 있다. 역사에서의 판단의 기준은 어떤 보편타당성을 요구하는 원리가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다. 문제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어떤 원리를 기준으로 할 것이 아니라, 주어진 역사적 조건 속에서 어떤 효율성이 있을 것인가를 기준으로 하여 검토해야한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역사 해석에 비추어서 내려지는 우리의 정치적 결정의 근원에는 타협이 존재한다.  바람직한 것이라는 무언가 가상적인 추상적 기준을 설정해놓고, 그것에 비추어 과거를 비난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오류는 없다.  불쾌한 의미를 가지게 된 성공이라는 말 대신, 반드시 가장 효율적인 것이라는 중립적인 말을 사용하도록 하자.

 

역사에서 객관성이란 바로 지금 여기 존재하는 어떤 고정불변의 판단기준에 의존하거나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미래에 남겨진 그리고 역사과정이 진지함에 따라서 발전하게 되는 그러한 기준에 의존하거나, 의존할 수 있는 것이라는 나의 명제를 설명해준다. 역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일관된 연관성을 확립할 때에야만 의미와 객관성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사실을 알고자 할 때 우리가 제기하는 질문, 따라서 우리가 얻게 되는 대답을 유발시키는 것은 우리의 가치체계이다. 주변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우리 능력과 주변환경을 우리에게 적응시킬 수 있는 능력 역사를 진보의 기록으로 만들어온 저 주변환경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우리의 가치들을 통해서 마련된다역사에서의 진보는 사실과 가치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성취된다. 역사가는 사실과 해석, 사실과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사람이다. 역사는 그 본질상 변화이며 운동이며 혹은 진보이다. 원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역사를 문학으로 바꿀 수도 있다. 그 이름에 걸맞는 역사는 역사 그 자체 안에서 감각을 찾아내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쓸 수 있다. 우리가 어딘가로부터 왔다는 믿음은 우리가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믿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역사관은 우리의 사회관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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