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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지음)

배운 괴물들의 사회

풀들조차 자라면 변한다. 사회도, 인간도 성장의 끝무렵에선 성숙의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 아저씨와 아줌마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명사는 뻔뻔함, 능청스러움, 악착스러움 등이다.  나이는 먹었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중년시절에는 그나마 아저씨, 아줌마라는 소리만 듣지만, 나잇값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변하지 않는다면, 더 경멸적인 표현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성장하면 결실을 맺는 건 자연의 이치지만 비료라는 촉매제를 만나면, 식물은 좀 더 빨리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인간에게 비료같은 촉매제가 있다면,  그것은 성장을 축진하여 성숙의 순간을 당겨주는 배움이다. 한국 사람중 읽고 쓰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고작 1.7%이다.  대학 진학률은 2009년 기준 무려 81.9% 이다. 이 정도로 엄청난 양의 배운사람을 배출하는 성장한 사회라면, 군자는 아니어도 최소한 성숙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품격있는 나라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배움에 투자했지만, 싸가지 없는 애들과 추잡스러운 중년과 나잇값 못하는 늙은이들이 뒤섞인 지하철 풍경은  배움이 사람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철석 같은 믿음을 접도록 만든다.

 

칸트는 계몽이란 미성숙한 상태에서 벗어나 성숙한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이라 했다. 칸트는 성숙한 인간 으로의 완성 가능성을 배움에서 찾았다.  부모는 배움을 통해, 자녀들이 세상에서 성공을 하여 입신양명하는 일에만 마음을 쓰고 있을 뿐이며 국가의 통치자는 배움을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필요한 도구 정도로 생각하지만, 철학자의 눈에는 배움속에서 인간이 야만에서 벗어나 성숙한 인간이 되는 과정이 보였다. 칸트가 보기에 교육의 최종목표는 이러해야 한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 어떤 목적 또는 여러 가지 목적들이 달성 되고 숙련된 유능한 인간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더 중요한 것은 교육을 통해서 오로지 선한 목적들을 삶 속에서 지향하고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의 성향을 길러야 한다. 여기서 선한 목적이란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들에 의해 동의되고 인정될 뿐 아니라, 또한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 의해 추구되는 목적들을 뜻한다. ' 교육은 필연적으로 성숙과 귀결된다. 하지만 우리는 '성숙'이라는 단어를 잊고 살고 있고 성숙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고어처럼 느껴지는 사회, 그 사회가 '성장물신성 사회'이다. 

 

클라이브 해밀턴은 팽창에 대한 묻지마 숭배를 '성장물신성'이라 불렀다.  성장물신성 사회는 ‘ 경제성장은 한 해에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이 얼마나 늘었느냐는 극히 평범한 생각에서 나온 개념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장대한 우리의 강박관념은 사람들이 영험이 있다고 주물을 받들고 모시는 집착이나 애착처럼 보인다.' 양적팽창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한 성장이 성숙을 대체하여 삶의 목표가 되는 사회에선 배움조차 성숙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수단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팽창숭배사회는 배움도 스펙으로 전락한다. 전국민이 죽어라 공부하고 졸업 후에도 승진하기 위해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지식사회의 외양은 갖추었어도, 성숙이라는 목표를 잃어버린 사회에서 배운 사람과 성숙한 사람은 일치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에서 교육은 범죄를 저지르는 괴물의 생산공장으로 전락한다.  화이트칼라 범죄는 배운 괴물들이 벌이는 악행이다. 성장했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배운 지식을 사용해 금융사기를 친다.  배우지 못한 장발장은 고작 촛대나 훔칠  뿐이지만... 배웠지만 성숙하지 못한 인간은 사회를 통째로 파괴하는 괴물의 짓을 서슴지 않고 한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은 아는 것은 독이다. 성장한 만큼 성숙하지 못할 때, 성숙없이 웃자라기만 한 인간은 거인병에 걸린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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