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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지음)

성인, 집

대부분의 사람이 성장하면 짝을 찾고,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구성한다. 모든 가족은 고유한 탄생의 스토리를 갖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 모두의 탄생과 성장에 관여되어 있다. 삶에서 처음 배우는 공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재에서 온다. 가부장제 질서하에서 아버지는 개인적 성격의 자애로움과 상관없이 기성의 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에 가깝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한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보다 세대를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 운명처럼 짊어져야 했던 시대의 이야기로 다양하게 연주된다.  사람들은 이렇게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사회적 운명을 뒤집어쓴채 괴로워하고, 신음하다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전 시대와 대결하는 방법을 깨닫고 그렇게 성인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인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이 누구의 자식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성인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감을 담는 그릇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도 여전히 누구의 아들이나 딸로 기억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들은 누구의 아들이나 딸인데다가 누구의 손자, 손녀이기도 하다.

 

나의 부모는 나의 과거다. 내가 성장하여 성인이 되면서 부모와 나의 관계는 변했다.  언제부터인가 과거인 아버지는 현재인 나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나는 성인이 되기 위해서 나의 과거인 부모를 미워하지도 부끄러워 하지도 않으면서 극복해야 한다. 누구든 자신의 부모를 극복하지 못하면 성인이 될 수 없다. 나는 오랜 대기시간, 기다림으로 인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대화가 통하는 말동무나 최신 테크놀로지  미디어 기기도 좋지만, 책이 곁에 있다면 다행이다. 책은 세상을 극복하기 위한 나의 도구중 하나이다. 여행에서 편안함이 깃들어 있는 우리 집을 돌아올 때 누구나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집이 제일 좋다고.  하지만 편안함은 때론 사유의 독이 되기도 한다. 익숙한 곳은 낯설게 보기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습관적인 사유를 반복하게 만든다. 너무 익숙해졌기에 편안한 곳의 의미를 쉽게 깨닫지 못한다. 여행은 친밀한 공간인 집에 대해 생각하기에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거주자와 집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맥락을 감안하지 않으면, 그저 비와 바람으로부터 사람을 보호주는 인공물일 뿐이다. 도시는 몇번지라는 추상적인 기호의 체계로 건축물이 얽혀있는 공간이다. 집과 집이 401호와 402호가 아니라 누구의 집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단순 건축물에서 생명이 있는 삶의 터전이 된다. 건축물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건축물을 집으로 맥락을 변경 시키는 과정을 우리는 '거주' 라 한다. 좋은 집의 조건은 도대체 무엇일까?  집을 구성하는 빠져서는 안되는 요소는 무엇일까? 인간의 거처를 지칭하는 집 대신, 현실적인 꼬락서니를 반영하는 다른 단어는 부동산이다.  집을 부동산이라는 단어로 포장하면 집은 터전이기를 그만두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마저도 교환가치에 포섭된 존재로 전락시킨다. 인간은 정주를 꿈꾸지만, 자본은 정주를 업신 여긴다. 자본은 정주하고 싶은 사람의 꿈을 하찮게 여기며, 유동의 자유를 강조한다.  자본이 이윤을 쫓아가면 갈수록 거주의 터전에선 막대한 규모로 난민들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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