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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지음)

게으름, 인정, 국가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의 정사正史의 주인공은 개미이지만, 외전의 주인공은 베짱이다. 경제는 꾸준히 성장했지만 노동시간은 도통 줄지않는다.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상품의 과잉생산과 제조과정에서의 질의 저하에도 불구하고,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노동자들이 일을 달라, 일을 달라고 애원하며 시장을 가득 메웠다.... 일단 일할 기회가 생기면 모두 '와'하고 그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일에 대한 게걸스러운 욕구를 충족 시키기 위해 12,14시간의 노동을 요구한다. 하지만 다음 날에는 노동에 대한 이러한 집착을 부추길 수 있는 음식물 하나를 얻어먹지 못하고 길거리로 내쫓긴다. 한 생물체를 파괴하는 과잉노동, 다음에는 두달 혹은 넉달 동안의 절대적인 휴식이 어어진다. 그리고 일을 멈추면 당연히 그나마 벌어들이던 약간의 수입도 끊기게 된다.  노동을 하지 않고 못베기는 나쁜 버릇은 마치 악마처럼 노동자 가슴에 착 달라붙어 있다. ’

 

기계가 발전해 전례없이 놀라운 속도와 정확성으로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고 있지만, 노동자들은 예전에 가졌던 여가시간을 더 연장하기는 커녕 기계와 경쟁이라도 하듯이 작업강도를 배가하고 있을 뿐이다. 라파르그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 일단 하루 할 일의 양이 정해지면 노동자들은 더 이상 서로 시기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의 손에서 일자리를 뺏고 다른 사람의 입에서 빵을 빼앗기 위해 싸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몸과 마음도 지치지 않을 것이며, 게으름의 미덕을 실천할 것이다’  개미에게는 전혀 들을 수 없었던 베짱이가 일하지 않는 이유는 ‘ 게으를 권리를 농담으로 들으면 부지런하지 못한 인간의 변명이지만, 진지하게 들으면 인간을 파산시키는 노동시간을 줄이자는 것이다.’

 

무관심하면 무수히 많은 사람이 동시에 있어도 서로 있는지 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관계는 관계를 낳고, 관계는 관심이 있을 때 유지된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온갖 이유로 서로 싸우고 있다.  평화는 누구나 원하는 이상적인 상황이지만, 현실적이지 않다. 진정으로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평화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투쟁에 나선 까닭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투쟁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싸움을 즐기는 싸움꾼이 아니다. 모든 개인은 사회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하지만, 물질적 궁핍 해결이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사람은 생존 그 이상을 원한다. 사람은 돼지가 아니라 자기 존엄을 추구하는 존재이다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얻고, 그를 통해 자긍심을 획득하지만 무시에 의해 자긍심이 훼손될 때에는 투쟁하는 끊임없는 ‘인정투쟁’과정이다. 인정에 대한 절실함은 보다 많은 돈이 넘치는 권력이 아니라, 자기 존엄이라는 스스로 부여한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정에 대한 요구가 부당하게 무시될 때 사람은 모욕감을 느낀다.

 

우리가 사회적 수치감 속에서 알게 되는 것은 굴욕과 모욕을 수동적으로 참아낼 때, 전형적으로 갖게되는 자기중심의 약화에 대한 도덕적 감정이다. 몰고다니는 자동차의 크기가 자신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명절날 선물로 들어오는 갈비세트 무게로 인정 여부를 확인하는 사람들은 정작 자기존엄에 둔감하면서도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물에 둘러싸여 있지 않을 때만 모욕감을 느끼는 물신화된 심성을 지니고 있다. 인정투쟁의 촉발 요인이 자기존엄에 대한 부정이기에 인정투쟁은 제로섬 게임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무시를 통해 부정 당했던 자기존중을 되찾는 과정이다. 전체의 통일을 위해 개인의 특별한 사정쯤은 묵살되어도 괜찮다는 사고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개인을 옹호하려면, 한편으로는 사소한 문제에 집착한다는 깔보는듯한 눈길과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주의자의 자기변명이 시작되었다고 의심하는 눈초리 사이에 끼기 쉽다.  공적 세계에서 개인이 무존재가 될수록 사람들은 집요하리 만큼 사적인 개인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개인에 대한 크고 작은 무시가 번성하면 개인보다는 전체를 우선시하는 전체주의까지 등장한다. 전체주의는 평범한 개인에게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기를 요구하는 괴물이다.

 

개인은 온갖 종류의 집단의 압력속에 노출되어 있다. 전체주의는 개인은 전체를 위해 희생해야 마땅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개인은 집단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가난한 개인에게 '당신의 가난은 오로지 당신 능력 탓'이라고 힐난할 수 없고, 부유한 개인의 부가 오로지 자신의 능력의 증거라는 것도 억지스러워진다. 개인구원의 최종책임은 개인에게만 있지 않다. 우리는 책임을 개인을 둘러싼 상황에 물어야 한다. 집단적 통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개인에 대한 관심이 이기심을 부추긴다고 협박하지만,  개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최종 책임의 담지자인 사회와 마주하게 된다. 한국인은 국가가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오직 부만이 나를 보호해준다는 교훈을 얻는다. 개인이 먹고살 걱정을 해결하지 못하는 국가는 개인을 대리할 자격이 없다. 개인은 국가가 최소한 먹고살 걱정을 해결해 준다는 믿음에 따라 많은 권리를 국가에 양도했다.

 

개인의 권리를 양도받은 국가가 국가에 귀속된 과대한 권리는 당연하고, 개인은 국가에 대해 의무만 지는 개체라고 주장한다면, 그때부터 국가의 정당성을 상실한 이익집단에 불과하다. 만약 그 이익집단이 소수개인의 이익만을 대변한다면, 그때부터 국가가 아니라 패거리라 불러야 한다. 따라서 해결책은 개인의 이기주의가 아니라 국가의 정상화다. 개인은 한편으론 득세하는 국가주의에 의해, 또 다른 한편으로 탐욕을 선동하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국가와 사회가 개인을 무명씨로 강요하는 악행의 근원일 때,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나만 잘살면된다'는 경제적 개인주의로 후퇴한다국가의 악행이 지속되는 한,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 한,  국가를 대신해 개인이 자신을 완전히 고립적으로 보호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차라리 순진하다. 학력, 재산, 권력은 잘난척을 낳지만 품위를 갖고있는 개인과 사회는 '배려'를 제일의 덕목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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