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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지음)

사회로부터 고립

한때 '진보'라는 변화가 무명씨들의 존재를 보호해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팽배했던 때가 있었다. 사회가 언젠가는 더 나아질 것이며, 종국에 선은 승리하고 악은 패배한다는 진보에 대한 믿음 자체가 사라진 시대와 대면했을 때, 무명씨들은 위안에서 마지막 비상구를 찾는다. 더 나은 미래가 도래하리라는 믿음의 상실로 발생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에겐 따뜻한 위로가 그 어떤 명약보다 효과가 있는 법이다. 진보라는 믿음을 상실한 사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야만적임을 그대로 드러내는 비탄의 소리로 가득 찬 다큐멘터리보다는,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를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위안을 느끼게 해주는 판타지 영화를 더 선호하는 법이다. 학자는 깊게 책을 읽을줄 알지만, 깊게 읽을 수 있는 범위가 너무나 협소한 이른바 전문가 바보가 되기 쉽다. 바보-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지식은 삶과의 구체적 연관성을 상실하기 쉽다. 그들은 자신이 세상과 사람과의 공통감각을 상실한 완전히 고립된 존재에 불과함을 철저히 깨닫게 될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세상으로서의 사회가 있다. 또 다른 세계는 학자들의 폐쇄적인 아카데미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로서의 사회이다. 각자의 세계에 분리된 채 살고 있다.

 

각각의 세계에서 그들은 서로 알아듣기 힘든 각자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모스키토 음’이라는게 있다. 주파수의 특성 때문에 특정한 연령대의 사람들만 감지할 수 있다고 알려진 소리다.  세상으로서의 사회에 가득 찬 모스키토 음은 세계로서의 사회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세상으로서의 사회'에 대해 늘어놓는 주정과는 구별되는 '세계로서의 사회'에 대한 냉정하고 체계적인 해석을 우리는 '이론'이라 부른다. 이론은 분명 술자리에서의 세상 한탄이 놓치고 있는 섬세한 결을 포착하고, 그 결에 체계를 부여할 수 있다. 사회를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하게 중력의 법칙을 따른다. 세상으로서의 사회와 세계로서의 사회사이에는 중력의 법칙이 작용해야 한다. 하지만 사회학자는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며, 사회와 세계에 관한 체계적 설명이라는 이론을 대기권 밖으로 몰아내기도 한다. 너무나 잘 알려진 데카르트의 제1명제 ‘코기토 에르고 줌 Cogito ergo sum'은 흔히 ’나는 생각한 고로 존재한다‘라고 번역된다.

 

내가 생각한다는 정신과 결합하지 못한 채 책을 통해 수입된 이론은 세상으로서의 사회와 세계로서의 사회 사이를 중재할 능력을 상실했다. 지적 장인은 자격증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공부가 출세를 위한 수단에 불과한 이상, 하나의 답을 놓고 경쟁하는 풍토에서만 공부한 이상, 교수든, 학생이든 누구든 책속에서는 생각했지만 세속에서는 ’내가 생각하지‘는 못했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감싸 안는 힐링과 따뜻한 카운슬링은 분명 쓸모가 있다. 하지만 치유의 순간적인 효과는 우리를 결국 중독으로 이끈다. 치유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은 오래가지 못한다. 치유는 휘발성이 강하다. 타인에 의존해 달성한 힐링은 고통을 가리는 위장막에 가깝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고통에 당신은 책임이 없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당신 마음속의 고통을 끝없이 만들어 내는 어떤 존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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