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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지음)

수치심, 취미인간

처지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평소 야만적인 행동을 경멸했던 사람이 불가피하게 그런 행동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수치심은 문명이 바람직하다고 간주하는 행동양식에서 벗어났을 때 울리는 경고음이다. 우리는 매너와 예의범절이 권장하는 행동을 수행했을 때는 자부심을, 하지 않았거나 못했을 때는 창피함을 느끼도록 프로그램화 된다.  수치심은 자기통제를 강화시킨다.  자기통제의 영구기관인 수치심을 배우는 학습과정을 엘리아스는'문명화'라 불렀다. 문명화 이전 서양인들은 포크없이 음식을 먹고, 코도 함부로 풀고,  테이블에서 방귀도 부끄럼 없이 뀌었다. 엘리아스는 문명이 야만적인 사람에게 수치심을 가르치러 나서기 시작하는 순간을 책속에 담았다. 식탁위에서 어느 빵이 자신의 것인지,  어느 물을 마셔야 하는지, 아직 제대로 교육받지 않아 테이블 예절을 알지 못하는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적인 사람을 위해 에라스무스는 조언한다. 냅킨을 받으면 네 왼쪽 어깨위나 팔에 놓아두거라. 귀족들과 함께 자리를 앉을 경우에 네 모자를 벗고, 머리가 잘 빗겨져 있는지 살펴라.... 식사를 하기 전에 잠시 기다리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소년들은 자신의 감정을 자제할 수 있는 습관을 기를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음식을 포크나 나이프로 집어라. 미식가들 처럼 온 접시를 헤적거리면서 음식을 고르지 마라.  바로 네 앞에 음식만 집어라.

 

궁정밖의 사람들에게 궁정 예절이란 그저 시간이 남아도는 귀족들이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 행하는 행동 일뿐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다. 궁정예절을 모른다면, 궁정안의 사람들만 창피함을 느끼지 궁정밖의 사람들은 궁정 예절을 몰라도 창피함과 거리가 멀었다. 궁정에서나 통용되는 특수한 행동거지 양식에 불과했던 궁정예절이 18-19세기에 사회적 관습으로 확산 되면서 귀족적 행동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했던 매너가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매너를 지킬때, 자부심을 지키지 못할때, 수치심을 느끼는 문명인에게 특정 행동을 유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문명인은 쪽팔림에 민감하다. 소비자본주의는 수치심 자극이 그 어떤 판매 기법보다 효과적이다. 

 

소비 자본주의가 확대될수록 대중이 수치심을 느끼도록 자극하는 영역은 점점 넓어진다.  유행에 뒤떨어진 옷을 입고 나서면 망신스럽다. 휴가를 해외로 다녀오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다. 골프도 쳐야 하고, 브랜드 등산복을 입어야 하고, 자동차는 남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크기는 타야한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체면이란 관념적 상태가 아니라, 소비수준의 증명이 된다. 라이프 스타일이 수치심을 자극하는 소비주의의 타킷이 되면, 삶을 영위하는 방법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더 이상 삶의 방식은 개인의 신조를 따르지 않는다.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의 목록은 점점 늘어난다시대의 트렌드에 뒤쳐질까봐 텔레비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시시콜콜 알려준다. 주름살과 뱃살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으니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광고 선생님, 외국인을 만나면 먼저 인사를 하라는 공익광고 선생님, 글러벌스탠다드를 가르키는 언론 선생님, 정체불명의 선진국 타령을 하며 학생들을 타박하는 정치인 선생님까지 다양한 선생님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를 살뜰히 보살핀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심의 대상영역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관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을 만났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혈액형을 물어보고, 출신지역을 물어보고, 직업을 물어본다. 직업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는 정보가 많이 딸려온다. 즐겨 입는 옷과 말투에서 직업을 짐작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내면은 직업상의 이유로 걸친 유니폼 속에 숨어있다.  승무원이 유니폼을 입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그 사람의 내면과 전혀 상관없다. 우리 모두는 직업이 요구하는 기능이라는 포장지를 입고 있다. 취미는 본래 직업상의 활동이 아닌 인간의 활동이다.  여행가이드에게 여행은 직업상의 업무이기에 취미가 아니지만, 은행원에게 여행은 취미다. 취미는 직업의 의무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활동이기에 직업적 노동과 달리 몰입과 열정을 만들어 낸다. 몰입과 열정속에는 그 사람의 내밀한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외부로 드러난 취미는 내면의 비밀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취미는 있어야 한다고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직업은 필수지만, 취미는 없어도 먹고사는데 지장없다. 특별한 취향이 없는 사람은 취미가 없을 수도 있다. 취미는 개인적 기호이다.  흰색을 좋아할 수도 있고, 검은색을 좋아할 수도 있다.  개인의 기호에 옳고 그름의 문제가 개입될 수 없다. 기호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도 없다. 취향은 개인의 개성이 발휘되는 영역인 한 본래 수평적이다. 어떤 취향은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그 사람의 경제적 살림살이를 나타내는 표식이 된다.  주말에 골프체를 들고 필드로 나가는 것은 운동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돈 좀 벌었다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공부좀 했다는 사람은 기회가 있을 때 오페라를 좋아함을 타인에게 드러내야 한다. 교양이 좀 있어 보인다. 겉으로는 취향 전쟁이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지위와 학벌의 전쟁이다.  백화점은 판매를 목적으로 잘 고안된 취향의 전시장이다.취미가 개인의 내면과의 관계로부터 이탈된 구매의 대상이 되면, 취향을 구매할 능력만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취미를 가질 수 있다.  취향이 판매되는 이상 취미가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특권적 표식이 되지 않는다. 부동산으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도 성공을 과시하기 위하여 골프를 취미로 고른다. 졸부가 아님을 드러낼 있는 표식이 필요한 사람은 백화점이나 은행에서 VIP고객을 위한 인문학 강의를 듣는다.

 

성인이 되면 누구나 돈을 벌어야 한다.  경제활동은 최소한의 조건이다.  최소한의 조건은 중요하지만, 인간은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된다고 만족하지 않는다. 취미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순간은 자발적인 활동일 때다.  노동이 생존의 필연성이라는 외부적 조건 때문에 강제된 행위라면, 취미에는 강제성이 끼어들 틈이 없다. 취미는 순전히 자발적 행동인 놀이여야 한다. 강제에 의해 억지로 해야 하는 행위를 하며 신바람이 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누구나 억지로 하는 일은 하는 시늉만 내지 자신이 하는 활동에 대한 애착도 긍지도 몰입도 없다.  하지만 자신이 원해서 행하는 일을 할 때 사람은 돌변한다. 에너지의 원천은 자발성이다. 본래의 취미는 귀족의 놀음이다. 취미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특권 세력이어야만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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