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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이성( 리처드 래저러스, 버니

슬픔/우울

누구든지 오랫동안 함께 살다가 갑자기 배우자를 잃게 되면, 슬픔과 우울을 느낀다. 남편의 주위에서 자신의 삶을 살다가 남편이 죽게 되면, 자신의 것으로 의지할 것이 없게 된다. 주로 신경화학적인 기원을 갖는 우울증에는 약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약은 의욕과 현실성을 유지해 나가는 것과 관련된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슬픔은 우울과 자주 혼돈되지만, 우울은 아니다. 그리고 상실직후 슬픔이 사람의 기분을 지배하는 일은 드물다. 모든 개인에게 해당되는 절대적인 규칙은 없다. 그러나 슬픔, 애도, 우울을 자극하는 큰 상실의 피해자들 대부분은 일정한 시기 동안 갈등을 겪는다고 볼 수 있다.  그 시기 동안 상실에 저항하고, 상실과 싸우다가 심지어 부정까지 하다가 마침내 상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상실을 돌이킬수 없는 것으로 재평가하고 나서야 애도는 슬픔이 된다. 슬픔을 자극하는 것은 단지 상실 자체가 아니라, 복구 불가능한 상실이다.  사실상 복구불가능한 상실이 슬픔의 극적 플롯이다. 피해자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가져올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상실을 받아들이는데는 보통 시간이 걸린다.

 

갈등, 저항이 일어날 때 우리가 겪은 감정은 분노, 불안, 죄책감이며 거기에 때로는 수치심, 선망, 질투, 희망이 섞이게 된다. 이것들이 상실이나 상실의 위협에 대한 저항과 적극적 투쟁의 주요한 감정들이다. 애도하는 사람은 상실을 막는 방법,  또는 이미 상실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을 돌이킬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는다. 분노, 불안, 죄책감과는 반대로 슬픔은 상실을 예방하거나 복구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포기하는 적극적이지 않은 상태이다. 슬픔은 보통 저항이나 부정과 같은 헛된 노력을 포기하고 나서야 나타난다. 사별한 사람이 상실을 받아 들이거나, 체념하게 되어서야 지배적인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체념과 수용의 차이는 미묘하다.  체념을 했을 때는 망설임이나 고통없이 상실을 인정한다.  상실을 받아들였을 때는 상실에 굴복하게 된 것이며, 고통까지는 아니라도 슬픔을 느낄 수 있다. 이때 슬픔은 억압적이지 않을 수 있다.

 

때로는 이런 슬픔을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애도를 상실에 대처하는 과정으로 여긴다. 일자리, 세상에서의 역할, 부유함 등을 잃었을 때도 애도한다. 배우자의 죽음은 상실 가운데 가장 스트레스가 크다. 결혼이 두사람을 워낙 상호 의존적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관계가 오래 지속되면 그 관계가 없어질 경우 스트레스가 엄청난 조정 과정이 필요하다. 자식의 죽음 역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게 한다. 분노, 불안, 희망은 모두 애도가 슬픔으로 바뀌는데 나름대로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경우 사별한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자 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별한 사람은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애도에서 생기는 불안은 삶과 죽음의 중심적 의미와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위협의 결과이다. 배우자의 죽음은 우리 자신의 임박한 사망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사회적 정체성을 박탈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찾도록 요구한다. 애도에서 생기는 죄책감은 자신이 죽음을 막기 위해 죽기 전에 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그 사람에게 충분히 감사하기 위해, 편안하게 죽게 해주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다.

 

자신과 죽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들도 있을 것이다. 조정을 거쳐야 애도가 끝나고 새로운 삶의 패턴을 쉽게 형성할 수 있다. 애도의 주된 과제는 과거를 부정하거나 과거에 화내지 않고, 미래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 것이다. 보통의 애도과정이 이루어지고 유족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사별한 사람은 애도 뒤에도 죽은 사람이 기억날 때 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이제 슬픔은 강렬한 비통함이나 공허와 절망이 아니다.  그 기억은 따뜻하고, 그리움에 찬 빛을 띨수 있다. 인생의 긍정적인 어쩌면 아주 행복한 단계에 대한 확인이 될 수도 있다나이 든 여자들은 다시 남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일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설사 어떤 남자에게 끌리더라도, 다시 상실의 상처를 입는 일은 원치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울은 감정적인 것이지만, 별도로 구분되는 하나의 감정은 아니다. 보통 자신을 향한 분노, 불안, 죄책감 등의 복합물이다. 흔히 두 종류의 우울에 대해 말한다. 하나는 유전적 기원을 갖는 것이며, 또 하나는 사회생활에 일시적으로 실패해서 생긴 결과이다. 생물학적인 우울은 보통 내생적이라 부른다. 내생적 우울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양극성과 조증을 번갈아 오가는 양극성과 우울증만 느끼는 단극성이다.  내생적 우울증의 주된 치료법은 약이다. 외생적 치료는 심리치료이다. 어린시절의 상실들이 자신과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어떤 습관을 길러내는데, 그것이 병적이거나 병을 일으킨다고 보는 것이 그런 취약성을 파악하는 전문적 관점들 가운데 요사이 가장 인기있는 것이다. 우울은 전문적 분야에서는 절망보다 훨씬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다.  우울은 상실에 대한 복잡한 감정적 반응으로 파악하고, 절망은 우울밑에 깔린 삶에 대한 관점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보통 애도라는 단어는 상실을 대처하는 과정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애도하는 사람은 그들이 궁극적으로 덜 괴로워지리라는 것, 심지어 완전히 괴로움을 넘어서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가 아주 많다.

 

우울은 상실이 그 일을 당한 사람에게 살 가치를 가진 것이 남지 않았음을 의미할 때 일어난다.  그 사람은 인생 전체에 대해 절망하는 것이다. 희망 없음은 우울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또 다른 말이다.  상실은 고통을 줄 수 있지만, 반드시 우리가 살만한 이유를 없애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울에 관해서는 삶에 대한 희망 없음을 느끼고 죽고싶을 수도 있다. 이럴때 삶에 대한 관심을 지탱할만한 것도 즐길만한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슬플때 운다. 또 우울하거나 애도할 때도 운다. 불행한 상황에서 우는것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그리고 인간만이 그렇게 하는 것 같다.  슬픔에서 또 하나의 이상한 것은 실제로 슬픔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누군가의 불행에 대해 슬픔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슬픔은 종종 격렬한 감정적 반응이라기보다 분위기에 더 가깝다. 격렬한 감정은 뭔가 슬프게 하는 일이 일어난 경우에 발생한다. 그리고 그런 일은 슬픈 감정을 구체적으로 자극하는 것이 된다. 슬픔과 행복은 불안과 마찬가지로 실존적 특징을 가진다.  슬픈 분위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실에 대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가를 말하기는 어렵다. 휴일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우울을 겪고 있을 때 슬프거나 우울한 분위기에 빠지기 쉽다.  삶이 유리하게 진전된다고 느낄 때 훌륭하거나,  사랑받거나 감사를 받을 때, 운명이 우호적이라고 느낄 때,  행복한 분위기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을 때, 행복하고 마음은 가볍고 좋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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