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감정과 이성( 리처드 래저러스, 버니

죄책감/ 수치심

죄책감은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감정인 동시에 우리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작용의 산물이다죽음을 피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적인 일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함께 물에 빠져 혼자만 살고 친구가 죽게 되었을 때는 자신이 살아남은 것을 부당한 일로 자신의 도덕적 잘못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어릴적 어머니로 부터 사랑을 받지 못해서 입은 끔찍한 외상이 차지하는 역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경우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자신에 대한 관점을 재구성하도록 유도해 줄 교정적인 경험을 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사람들이 죄책감을 경험하려면 자신이 도덕적 규범을 어겼다고 느껴야 한다.  그리고  도덕적 규범을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들 가운데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죄책감의 극적인 플롯은 도덕적 규범을 어겼기 때문이다. 죄책감은 고통스러운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의 비합리적인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죄책감은 매우 유용한 감정이다.  대부분의 문화와 종교는 도덕적 구속들 가운데 많은 것들을 받아들인다. 사실 그것은 인간들에게 보편적인 것들이라 간주할수 있고, 어떤 사람들 말대로 자연법이라 간주할 수도 있다.

 

부모는 아이의 분노를 통제하려 하고 아이는 그런 통제에 저항한다.  아이들은 금지된 충동을 표현하거나 행동으로 옮길 때 처벌받을까봐 불안해 한다. 아이들이 안전을 느끼기 위해 금지된 충동을 억누르고, 마치 그 충동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든다. 그리고 부모의 기준을 자신의 것으로 채택한다.  그것이 아이의 양심이 된다. 따라서 위험한 충동은 지하로 가게 되어 무의식이 된다.어떤 이론가는 죄책감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감정이입을 하는 자연스럽고,  생물학적인 경향이 반응한 것 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점차 다른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려는 욕구로 변한다고 말한다. 이런 이론가들은 인간이 늘 집단을 이루어 산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도덕적 명령을 위반하는 것이 죄책감이 일어나는 과정의 중심 주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죄책감이라는 쓰라린 고통에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속죄하거나, 보상하거나, 배상하거나,  상대가 입은 피해에 대한 벌을 받으려는 충동을 일으킬 수 있다.  죄책감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때로는 방어적으로 우리 행동을 정당화 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비난함으로써 대처하려 한다.

 

도덕적 위반에 뒤따르는 적당한 사회적 행위는 사과하고, 보상을 하는 것이다. 죄책감 없이 사과를 할 수도 있다. 그런 사과는 제도화 된 사회적 관행의 표현일 뿐이다.  전혀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과가 효과가 있으려면 진지해 보여야 하고, 굽실거리듯 보여야 하고, 어떤 개인적 희생을 하겠다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손해를 본 사람이 받아들이게 된다. 늘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늘 모든 것에 대해 사과한다.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개인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이 패턴은 죄책감이라기 보다 사회적 불안의 패턴이다. 죄책감의 플롯을 요약하자면 자극은 우리가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믿고 있는 행동규범을 침해하는 생각이나 행동이다. 그 뒤에 깔린 개인적 의미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도덕적 책임, 그리고 이런 책임 위반의 결과로 예상되는 것에 대한 관점과 관계 있다. 그런 점에서 실존적이다.  이런 의미는 한편으로 우리를 돌보는 사람들, 동료들, 사회 전체가 제시하는 도덕적 가치들을 해석하고, 내재화 하는 방식에서,  다른 한편으론 삶의 경험에서 나온다.

 

수치심의 개인적 의미는 그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실패했다는 것,  그 실패가 그들의 성격 가운데 부정적인 어떤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 의미는 상황에 따라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괴로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벌어진 일이 자기 탓이라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주어진 행동이 개인적 이상에 어긋나고, 또 다른 사람들의 경멸을 받게 될 때 수치심을 느낄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수줍음도 수치심의 한 형태로 취급한다. 수줍음 역시 개인적인 노출의 위협과 관련되어있다는점에서 수치심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회적인 불안의 한 유형으로 취급된다. 도덕성과 개인적 이상은 둘 다 우리의 내적 기준들과 관련이 있는데 이 기준들은 어린 시절에 사회와 어른들 특히 우리를 기른 사람들과 접촉한 경험에서 파생된다. 우리는 어렸을 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배웠다.  여기서 좋다는 것은 모호하다. 그 의미는 좋다는 말뒤에 깔린 구체적인 가치들을 밝히지 않는 한 분명해질 수가 없다.

 

가치와 이상들은 사회의 특징들로 존재한다.  그것들이 개인에 의해 내재화 되면서 개인 관점의 일부를 이룬다. 프로이드는 죄책감과 수치심 둘다의 원천이  초자아라고 했다. 죄책감일 경우 공적으로 죄를 씻지만, 수치심 일 경우 그것을 남에게 감춘다. 유년시절의 보호자들은 아이들의 자아 이상의 발전에 큰 영향력을 갖는다. 아이들이 그들에게 장기간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는 부모 같은 인물들과 동년배들에게 양심과 자아 이상을 얻는다. 이 사람들이  '우리가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을 설정해 주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의 행동이나 태도가 이 기준에 부합되지 않을 때, 비판하거나 벌을 준다. 수치심에서 개인적인 좌절은 자신의 개인적 이상 또는 자아 이상에 맞추어 행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감정의 극적인 플롯이다. 개인적 이상들에 맞추어 행동하지 못한 상황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과 늘 수치심에 젖어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후자의 경우는 기능장애이다.  구약에서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수치심을 발견했다고 나오는 데, 이 수치심이란 벌거벗었다는 자의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수치심은 사실 수치심이라기보다 당황스러움이다.

 

수치심에 특히 취약한 사람들은 자기가 나쁜 사람이라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거부 당할까봐 걱정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수치심에 대처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부끄러워 할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잠재하는 수치심이 많아지면 분노도 강해진다. 그건 '다른 사람 잘못이다'로 생각이 바뀌면 수치심을 피할수 있다. 아니면 수치심은 분노로 바뀐다수치심을 느끼면 우리가 무력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믿게 된다. 반면 분노는 특히 공격으로 표현될 경우 자아 정체감에 대한 적극적인 방어가 된다. 불안은 삶과 죽음의 문제와 관련된다. 불안은 대체로 타인이나 세상과 관련을 유지하고자 노력할때 촉진된다. 그런 관련성은 삶의 무상한 본성 때문에 늘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반면 죄책감은 도덕적 가치들을 어기는 것과 관련된다. 수치심은 개인으로서 형성해온 개인적 이상에 맞추어 행동하지 못하는 것과 관련된다. 이런 학습된 가치들은 우리 자신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세상과 충돌하면서 구성하는 개인적인 의미들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들에서 일상의 감정들이 나온다.

 

 

'감정과 이성( 리처드 래저러스, 버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픔/우울  (0) 2014.05.28
안도감/ 희망  (0) 2014.05.25
불안, 공포  (0) 2014.05.22
선망2  (0) 2014.05.21
선망1  (0) 2014.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