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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처럼 질문하라(크리스토퍼 디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2

국법의 대부분은 국민이 법을 따르기로 선택할 수도 있고 따르지 않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고 간주하고 그 선택에 처벌이나 보상을 부여한다. 적신호를 무시하고 건너가면 경찰이 딱지를 뗀다. 강제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당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결정이라는 것이다.  자연주의자는 영혼의 잘못이 아니라, 자연적 체계들이 작용하는 방식이 그렇다고 믿는다. 자연적 체계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자연적 체계와 문화적 체계 내부에 얼마나 많은 인과관계의 쌀알이 우리 행동에 책임이 있을까?  과학이 우리 자신의 행동을 거의 통제할 수 없다고 밝혀내면 어떻게될까? 통치체계는 어떻게 변할까? 선과 악의 개념은 순전히 우연과 운의 문제가 된다. 만일 선택과 자유의지가 더 이상 인간의 픔성과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아니라면 우리는 선과 악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자기행동에 대한 통제와 범위를 결정하려면 우리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제약을 직시하고 과정들을 이해할 수단을 개발해야 한다. 자기가 하고 있거나, 한 일이 잘못되었거나, 위법이라는 사실을 판단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우리는 그의 행동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까지 물을 수 있을까? 나는 그런 행동이 범죄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무엇이든 우리가 선택한 방식으로 행동할 권리는 없다. 간절히 원한다고 해도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 행동을 얼마나 통제하거나, 하지 않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 대한 이해를 높이면, 자기 행동을 통제하는 맥락과 제약을 더 잘 이해할수 있다. 사람들의 발전과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제약을 더 잘 이해할수록 우리는 그런 제약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감싸 안을 수 있을 것이다.  자연주의자는 인간행동의 가치를 판단하는 막중한 일을 하려면, 먼저 주어진 상황의 맥락에 어떤 제약들이 영향을 끼쳤는지 따져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행동의 좋고 나쁨이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전에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기까지의 맥락적, 물리적, 사회적 제약의 두터운 층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두고 그것을 칭찬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만큼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우리 행동과 성품에 어떤 제약들이 영향을 끼치는지 더 잘 파악할수록 책임에 대해 좀더 신뢰할 수 있는 관점을 얻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환경을 통제할 때 성취와 만족감을 느낀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이로운 일은 자기 삶을 통제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삶을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부의 크기에 따라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판단하는 것은 우리는 종종 결과가 사람을 말해준다고 잘못 판단한다. 사람에 대한 정상 사고이론은 행동과 보상의 관계가 무작위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성의 영향이 우리 자질이나 행동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영화배우를 배우 지망생보다 재능있다고 생각하고, 세상 갑부들을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모두는 돈에 너무 쉽게 속는다. 가난한 사람이나 노숙자를 보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이다.

 

초자연주의자들은 신의 은총이 있다면 혹은 없다면, 나도 저렇게 되었을지 모른다고 말할지 모른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 대부분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무작위성에서 기인한 물리적, 사회적 제약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사람의 결정과 행동이 좋은지 나쁜지, 옳은지 그른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세계 여러 사회간에 몇가지 공통 규칙이 있다. '남들이 당신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마라'이다.  이 말의 중요한 의미는 '공정성'이다.  세계 대부분의 신앙과 종교에 나타난다. 공정성이 아마도 역사상 가장 오래된 윤리원칙일 것이다. 공정성은 윤리적 딜레마에 빠진 수 많은 사람에게 실질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불공정해지면 본질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힐 수 있다. 누구나 알다시피 세상에서 해악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나 불필요한 해악을 피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수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친 무자비한 독재자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윤리를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할 때 우리가 얻을수 있는 도구 하나가 '인내심-해악 반비례 법칙'이다. 이 법칙은 인간이 다른 종에게 불필요하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용인되어야 한다는 개념이다. 인내심- 해악 반비례 법칙 작동 방식은 간단하다. 어떤  개인 또는 집단의 믿음과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지 않는 불필요한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만일 내가 내 믿음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불필요한 해악을 끼칠수록 다른 사람들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내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우리는 인내심과 해악 사이에 반비례 관계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우리 믿음과 행동, 남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가능한 한 윤리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 삶을 지배하는 대단히 복잡한 수많은 제약과 무작위적인 환경을 이해하고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윤리원칙에 따라 살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힌두교에서는 다르마dharma와 카르마karma를 믿는다.  다르마는 질서, 적절한 행위, 도덕성, 법, 의무, 정의을 일컫는 개념이며, 사람들은 다르마가 만물을 제자리에 있게 하고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요소라 믿는다. 카르마는 그 사람이 전생에 행동한 방식으로서 현재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며 현재 삶의 방식은 다음 생애에 영향을 끼친다는 개념이다. 다르마와 카르마의 중요한 윤리 계율은 아힘사ahimsa 또는 비폭력 일 것이다. 아힘사 개념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숙명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전제한다. 이슬람교도가 적을 향해 자기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정당하다. 자기 방어는 대부분의 시민권과 인권에도 반영되어 있다. 기독교도가 계율을 따르는 것은 죽은 뒤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힌두교도는 그래야 다음 생에 더 나은 삶을 살거라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