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묻는다. 왜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 항상 더 많이 원하는 것처럼 보일까? 욕구는 개별적이지만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이나, 권장되거나 억압받는 방식은 사회적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 지루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필요가 모두 충족되고 불편함이 모두 사라지면 고요한 만족감이 아니라, 불만의 상태가 남는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새로운 것이 나와 그 불만을 없애주어야 한다. 그리고 최고급 리조트에서 보내는 휴가,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 또다른 여러 희귀한 재화는 사회가 아무리 부유해진다해도, 그 사회의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케인즈의 제자 로이 해로드는 희소성의 소재를 '과두적 재화'라 불렀다. 과두적 재화가 반드시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만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부족할 수도 있다. 그 재화를 많이 만들수도 있지만 만들지 않는다.
경제학자 프레드 허쉬는 과두적 재화를 ‘지위적 재화’라 부른다. 그것을 소유하는 방법은 부의 절대적 수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상대적 지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전반적인 풍족함의 수준과는 상관없이 늘 사회의 최고부자들이 가져가는 몫이다. 따라서 그것을 손에 넣으려는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경쟁은 경제가 성장할수록 치열해진다. 가계소득의 더 큰 부분이 그러한 지위적 재화를 얻는데 점점 더 많이 투입될 것이다. 케인즈는 여가를 만인이 원하는 편익으로 보았지만 그것을 비용으로 보는 말하자면, 일하지 않는데 드는 비용으로 보는 다른 시각도 있다. ,소비재가 여가를 늘리기 위해 더 많이 사용될수록, 그러한 것을 갖추기 위해 더 많이 벌어야 한다. 생산적 소비에 필요한 재화의 목록이 길어지는 상황은 우리를 일에 묶어놓는 것이다.
본성적인 조바심이나 지위적 재화, 효용극대화 등 끝없는 욕구를 개인의 문제로 설명하려는 이론은 개인이 원하는 것과 타인이 가진 것 사이의 비교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욕구의 표현은 언제나 사회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은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끝없는 욕구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은 욕구의 상대적 성격을 중심으로 한다. 어느 정도 물질적 부를 가졌더라도 우리는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늘 있기 마련이므로,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부의 경쟁이나 소비경쟁이 시작되면, 그것이 바로 지위의 경쟁이다. 동료인간들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자기는 그러한 필요를 느낀다는 의미에서의 '절대적인 필요'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이 지위를 더 높여준다고 느낄 때, 즉 우리를 동료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한에서만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에서의 '상대적인 필요'라는 두가지가 있다. 우월성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필요는 정말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대적인 필요에 대해서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케인즈가 살았던 시기는 가계소비의 대부분이 식비, 주거비, 의류와 난방 등에 들어가던 시기였다. 물질적 재화라는 개념 자체의 범위가 넓어져 사고 팔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데 발상이나 노래 곡조 심지어는 인간의 정체성까지도 그 범위에 들어간다. 경제학자와 사회학자들은 지위를 높이기 위해 구상된 소비를 세 유형으로 분리했다. 첫째 밴드왜건재화(bandwagon goods) 다른 사람들이 이미 가졌기 때문에 나도 갖고 싶어지는 재화이다. 그 다음이 속물성 재화이다.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기때문에 갖고 싶어지는 재화를 말한다. 그리고 베블런 재화인데 과시적 소비에 관한 미국의 위대한 이론가 소스타인 베블런의 이름을 딴 재화이다. 비싸고 또 비싸다고 알려져 있는 한에서 욕구의 대상이 된다. 계층적 서열이 존재하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누가 비행기 일등석을 타는지, 이코노믹을 타는지를 보면 회사내 서열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베블런적 현상은 '블링효과'이다. 가격이 높을수록 그 브랜드는 더 배타적인 것이 되며, 가격이 낮아지면 그 브랜드를 원하는 수요도 줄어들 것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돈을 추구하는 목적은 소비의 수단으로서만 아니라, 그것이 우월한 업적을 드러내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와 권력을 취향을 사람들에게 각인 시키고 싶은 욕망이 도시를 장식하는 근사한 건물을 짓게 한다. 단지 끝도 없는 욕구가 도를 넘어 더 심해지면, 좋은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기만해도 충분하다. 끝없는 욕구의 성향은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사회적 성격에 있다. 자본주의의 경쟁적 논리는 회사들로 하여금 욕구를 조작함으로써 새시장을 만들도록 몰아부친다. 자본주의는 지위 경쟁의 범위를 엄청나게 넒힌다. 알렉시스 드토크빌은 19세기에 쓴 ‘미국 민주주의’에서 " 유럽에서는 돈을 버는데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없다. 하층 계급은 돈을 벌 희망이 없고, 상층계급은 그 문제를 생각하는 것을 저속하게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근로자들이 힘들게 일하면 자기들도 부자들과 같은 사치를 노리는데 필요한 재산을 모을지도 모른다고 믿는 것은 미국에서나 가능하다. 사회적 평등과 소득불평 등의 미국적 혼합이라는 것이 자본주의 규칙이 되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서로 서로 경쟁하는 상황을 낳았다. 불평등이 커질수록 경쟁압력도 커진다. 경제학자 리처드 프리먼은 이렇게 말한다.“ 임금 격차가 극심하면, 소득의 분포 서열을 기어올라가는데 필요한 일을 하고자 하는 상당한 유인동기가 생긴다. 더 오래 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임금 격차가 더 큰 직종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다른 직종에 비해 더 열심히 일하는 경향이 있다. 자유시장,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어느 정도의 돈이라면 ‘충분함’을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한결같이 적대시했다. 그러한 생각은 무능력 하며, 삶의 여건을 개선시키려는 자연적 욕구를 좌절시킨다.
현재의 부자들은 왜 일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80년전에는 '신사로서 살아가기에 충분한 재산이 있으니까'라고 대답했겠지만, 지금은 터무니 없는 말이라고 일축할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를 점점 더 화폐화 함으로써 끝없는 욕구를 확대한다. 여기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재화와 서비스를 점점 더 시장화 하려는 경향때문에 자본주의는 화폐에 의한 측정 가능성의 영역을 끊임없이 넓히고, 그럼으로써 직접 비교하기가 더 편리해진다. 교육도 좋은 삶을 위한 준비로서가 아니라, 인적자원의 가치를 높이는 수단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화폐로 측정되는 영역을 넓힘으로써, 돈 그 자체에 대한 사랑에 불을 붙인다. 순수한 화폐의 세계에 살면서 사물의 가치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다. 우리가 훨씬 더 풍족해졌음에도 좋은 삶의 실현을 위해 우리가 서 있는 출발점이, 그가 살던 시절의 더 전통적인 사회에 비해 훨씬 더 불리하다. 자본주의는 부를 창조하는 면에서 발전했지만, 그 부를 활용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