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즈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것은 노년 때문이 아니라, 너무 빠른 변화로 인한 성장통 때문이다. 한 경제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재적응이 주는 고통스러움이다." 실업에 대해서는 "노동력의 새 용도를 찾아내는 즉 새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속도가 노동력을 아끼는 혹은, 인건비를 아끼는 수단을 발견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데서 기인하는 실업“이라는 것이다. 케인즈는 대규모 전쟁도 없고 인구가 크게 증가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100년이내에 경제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었거나, 적어도 해결을 목전에 두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노동을 조금만 하더라도 물질적인 필요가 모두 층족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예술가나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한 이들에게서나 보이는 삶에 대한 자발적이고, 즐거운 태도가 사회 전체로 확산되는 것이었다.
케인즈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철학자 조지 에드워드 무어의 제자였다. 무어는 “공적이거나 사적인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러한 일을 위해서이다. 그러한 것이 최대한 많이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인간의 행동이 추구하는 이성적으로 궁극의 목표이자, 사회적 진보의 유일한 기준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했다. 케인즈의 에세이는 두가지 예견과 한가지 가능성을 제안했다. 두가지 예견은 성장과 노동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쯤 우리는 하루에 3시간 이상 일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모두 만족시킬 만큼 충분한 물자를 가지는 순간에 도달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분의 여가시간을 현명하고, 즐겁고, 잘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견했다.
1인당 실제소득은 케인즈가 예견한 것과 비슷하다. 케인즈는 큰 전쟁이나 인구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가정했으나, 세계대전이 한차례 더 있었고, 인구는 3분의1이나 더 늘어났다. 노동시간이 생산성 증가에 비례하여 줄어들 것이라는 케인즈의 예견은, 상식적인 추론에 따른 것이었다. 한계효용의 체감의 법칙에 의해 소득이 많아질수록 추가적인 만족도는 더 적어지므로, 일보다는 여가를 선호하리라 가정한 것이다. 한 시간 더 노동해서 얻어지는 효용보다는 1시간의 추가적인 여가가 주는 효용이 더 커지는 시점까지 노동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현실은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 1870년에서 1930년까지 1인당 노동시간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1930년에 산업계의 노동시간은 1주에 50시간 이었다. 오늘날 노동자는 1주에 40시간 일한다. 케인즈의 추산에 따르면, 1주에 15시간 정도만 일하고 있어야 한다. 급격한 인구증가가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처절한 빈곤 상태에 묶어두고 있다. 1930년대 세계 인구는 27억명이었다. 오늘날 인구는 70억 그때 인구의 2배반이 넘었다.
2011년에 영국인 평균소득이 연간 2만5000파운드라고 한다면, 우리는 영국인들이 대부분 2만 5000파운드를 벌고, 일부는 조금 덜 벌고, 일부는 조금 덜 벌 것이라고 생각한다. 10명을 뽑아서 사장은 연간 16만 파운드를 벌고, 노동자 9명은 각각 1만 파운드를 번다고 하자. 그러면 그들 소득 평균치는 2만 5000파운드이다. 이러한 것이 선진국에서 전형적인 상황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평균보다 적게 벌고 소수만이 그보다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평균값을 조사하여 전형적인 상황을 연역해 내려는 오류는 소득분배에서 생기는 문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다. 미국같은 이민사회에서 돈을 번다는 것은 곧 성공하는 것이고, 유 럽사회는 돈벌이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을 낮게 평가하는 문화가 있었다.
평균 노동시간의 감소는 한 국가내에서도 집단에 따라 노동시간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총노동시간은 그대로 유지되더라도, 저임금 노동자는 대개 원하는 것보다 더 적게 일하는데 비해 고소득 노동자들은 필요이상 긴 시간을 일한다. 부자들의 노동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노동과 소득의 전통적 관계가 이처럼 뒤집히는 현상은 우리가 노동없는 미래로 향하고 있지 않음을 뒷받침 한다. 연간 노동시간이 즐어든 것은 휴가기간이 늘어났기 때문이며, 그것을 상쇄하는 것은 출퇴근 노동시간과 가사 노동시간이다. 노동수요가 증가하여 여성들이 노동시장으로 가게 되었다. 미국에서 1930년대에는 일하는 여성의 비율이 25%였는 데 지금은 70%이다. 쇼핑에 드는 시간과 자녀 양육에 드는 시간도 늘어났다. 노동시간의 통계에는 노동하는 기간만 포함되며, 교육받는 기간이나 계속 길어지고 있는 퇴직에서 사망까지의 기간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1948년에 영국남자는 평균적으로 65세까지 일을 했고, 그로 부터 2년뒤에 죽었다. 오늘날에는 67세에 퇴직하여 평균 11년을 더 산다. 긴 여가를 말년에만 몰아넣는 것은 잘못이다. 수명이 늘어났으니 여가시간이 길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부유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1930년대에 비해 4-5배 이상 부유해졌지만, 평균 노동시간은 그때보다 15%가량 줄어들었을 뿐이다.
케인즈는 왜 소득이 많을수록 사람들이 일하기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케인즈는 사람들이 원하는 물질적 필요의 양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언젠가는 충분히 채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이렇게 믿은 까닭은 필요와 욕구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좋고 안락한 삶을 위한 객관적 조건인 필요는 양적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욕구는 순수하게 심리적인 것이므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무한히 늘어날 수 있다. 케인즈 주장의 가능성 즉, 우리가 지혜롭고 즐겁게 살아가도록 여가를 활용하게 되리라는 가능성은 어찌 되었는가? 아무나 못들어가는 골프클럽에서 열리는 비공식 회의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인맥을 쌓기 위해 파티를 열고, 휴가기간 동안에도 전자기기를 통해 사무실과 소통을 계속한다. 이러한 사장들의 행동은 목적 의식적 행동이다.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그 자체의 가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을 위해서 라는 말이다. 사실 오늘날 사치스런 문화에서 목적의식이 줄어들기는 커녕 점점 더 강해지고 있고, 사람들은 더 서두르고 여유는 없어진다. 이러한 모순은 왜 일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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