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일하는 시간을 줄이지 않는 것은 일을 즐기기 때문이거나, 그만큼 일을 하지 않을수 없기 때문이거나,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레닌은 성 바울의 말을 빌려 선언했다. 케인즈는 당시 경제학의 견해에 따라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치르는 대가가 일이라 생각했다. 성경은 신에게 불복종하는 인간이 그 벌로 노동을 하도록 저주를 받았다고 말한다. 일은 더이상 경제학자가 말하는 노동이 아닌, 애정을 가지고 행하는 활동이다. 자극받고 정체성을 확립하고, 가치와 사회성을 얻게 해주는 근원인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 일은 더 이상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만족감을 준다. 이것이 왜 사람들이 생계유지에 필요한 이상으로 오래 일하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전문직의 사람들은 저소득층보다 더 많이 일한다.
흔히들 묻는다. 일하러 갈 필요가 없어지면 사람들은 무얼하고 살까? 술이나 마시고, 마약에 젖을까? 하루종일 텔레비전 앞에 죽칠까? 이러한 물음이 밑바닥에는 인간의 본성이 게으르다는 견해가 깔려 있다. 그들을 생산적으로 만들고, 궤도위를 제대로 달려가게 하고, 동물수준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려면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은 강제적인 사회성을 제공한다. 여가는 강제적인 고독을 가져올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에도 언제나 원칙적으로 만족감을 준다. 다들 빵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어쩔수 없이 그런 경우도 있지만. 사람들이 동료의식을 느끼기 위해 혹은 가정생활의 어려움이나 지루함을 벗어나기 위해 장시간 동안 일할 수도 있다. 전문화로 인해 일에서 기능이 필요없게 됨에 따라 다양한 일에서 맛보는 보상감은 줄었다.
기능화라고 하면, 과거에는 어느정도 지식과 기민함과 참여를 필요로 했던 일을 기계적인 것으로 만드는 현상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엄청난 일들이 정해진 절차만 따르는 것으로 축소 되었고, 문자 그대로 사람은 바보 취급당하게 되었다. 최고 소득자들이 과거에 그랬던 것보다 더 오랜시간 기꺼이 일하려는 것은 일이 흥미로워졌기 때문이 아니라, 소득이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다. 소수의 직업이나 일부의 어떤 직업은 사랑 받을만 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애정의 대상이 아닌 직업이 거의 대부분이다. 노동자들이 근로시간을 줄이지 않은 것은, 더 적게 일해도 될만큼 실질소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도 나름대로 일과 여가 사이에서 저울질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저울질은 자본가 계급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체제내에서 이루어진다. 1980년대이후 소득의 불평등이 커졌다. 생산성증대로 인한 혜택을 가장 많이 가져간 것은 부유층이다. 1970년에는 미국의 최고위 CEO보수가 평균 근로자의30배를 밑돌았는데 지금은 263배이다. 영국의 상위 20개 기업 CEO의 기본급이 2000년에는 근로자 평균급여의 47배였지만, 2010년에는 81배가 되었다.
최근들어 소득분배에 영향을 미친 지배적인 요인은 서비스산업경제의 성장, 그리고 서비스산업의 성장과 함께 자연히 불평등을 상쇄시키려는 방향으로 조세제가 실패한 것이다. 케인즈시대 제조업의 비중이 80%, 서비스업 비중이 20%였다. 서비스업은 평균적으로 그 업종이 대체한 제조업에 비해 보수가 낮은 편인데, 이는 제조업만큼 자동화 될수 없는 노동이다. 교사, 간호사, 미용사, 택시운전수 같은 직업이 그 예이다. 선진국에서 소득 재분배에 실패했다는 것은, 서비스 산업 하부에 속하는 직업의 피고용자들 특히 소매업, 개인서비스업 등의 노동자들이 극심한 빈곤을 벗어나려면, 더 긴 시간동안 노동을 해야한다는 뜻이다.
사회학자 줄리엣 쇼어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권익보호가 취약한 상황에서 경쟁압력만 커질 때더 많은 인력을 고용해 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보다, 기존 노동자들에게 더 오래 일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쇼어의 표현에 따르면, 필요한 노동시간을 더 많은 직원에게 분배하는 것보다는 더적은 수의 직원을 더 긴 시간동안 일하도록 하는 편이 회사의 수익률을 높인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을 원하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이 일하게 되는 정규직으로 이루어진 핵심집단과 실업이나 반실업 상태에 처한 주변인력으로 나누어진다. 후자는 원하는 것보다 덜 일할 수 밖에 없고,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기도 힘들다. 소비지상주의는 여가시간을 빼앗긴 노동자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뇌물같은 역할을 한다. 좌절감을 달래고, 고분고분하게 만들게 위해 그들 앞에 차려진 것은 생각을 마비시키는 쓸모없는 소비재들이다. 쇼핑요법이라 부르는데, 이 말은 불쾌하거나 우울한 경험을 달래기 위한 보상이다. 덜 일하고, 덜 소비하는 경제를 향한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소비하기를 원한다. 소비자의 선호가 실질적으로 필요와 다를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다.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로버트 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우스트적 협상1 (0) | 2014.01.14 |
---|---|
케인즈의 오류3 (0) | 2014.01.09 |
케인즈의 오류1 (0) | 2014.01.07 |
좋은 삶이란? (0) | 2014.01.06 |
무엇을 위한 성장이고 무엇의 성장인가? (0) | 2014.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