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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로버트 스

좋은 삶이란?

좋은 삶은 무엇이고, 좋지 않은 삶은 무엇인가? 철학자들은 경험세계의 어지러운 상황에는 고개를 돌린 채 완벽한 정의시스템을 구축한다. 반면 경제학자들은 주관적 욕구를 어떻게 하면 잘 충족시킬 것인가를 묻는다. 케인즈의 성장에 대한 예견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그러나 우리는 왜 100년이 지났는 데도 여전히 힘들게 일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자유시장 경제가 고용주들에게 노동시간과 노동조건을 좌지우지 할 힘을 주며, 우월감을 맛보기 위해 경쟁적으로 소비하고 싶어 하는 우리 내면의 성향에 불을 지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성장을 멈추고 분배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반대로 무엇보다 지금은 성장의 종결을 거론할 시기가 아니다며, 케인즈가 있었다면 실업을 낮추고 정부 빚을 청산하기 위해 성장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당장의 절박한 요구가 궁극적 목표를 보는 우리 시야를 가린다.

 

조각가는 대리석을 자르는 일에, 교사는 어려운 이론을 이해시키는데 몰두하며, 음악가는 악보와 씨름을 하고, 과학자는 우주와 시간의 신비를 탐구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가 잘하는 것을 해내는 것 외에 다른 목표가 없다. 그들의 노력에서 소득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행동동기는 소득을 얻으려는데 있지 않았다. 현실 세계에서는 금전적인 보상 등 외적보상에 대한 생각을 우리 머리에서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그렇기는 해도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한 고역은 끝나고 여가가 시작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이상이다그러나 여가가 늘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리같은 무기력한 인간은 무슨 일이든 하려면 돈이라는자극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다면 우리는 자연히 게을러지고, 좋은 삶이 아니라 권태로움과 신경증과 술독에 빠지게 된다. 산업의 궁극적 목표가 게으름이라면, 우리가 일하고 창조함으로써 후손들이 대낮에도 텔레비전을 볼 만큼 편안한 시간을 한없이 누리게 된다면, 모든 진보는 오웰의 말처럼 절대 달성되지 않기를 바라고 기원하는 어떤 목표를 향한 광적 고투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어떤 새로운 기획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무의미하다 해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북돋아 그것을 시도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에 있다.  우리는 진정한 여가의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경제학자들은 인간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하려면, 당근이든 채찍이든 자극이 있어야 하는 노새와 같은 일 짐승이라고 본다근대 경제학 이론의 개척자 윌리엄 스탬리 제본스는 인간의 문제가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큰 만족을 충족하려는 것'이라고 보았다. 기계적이고 노예적으로 시간을 보내도록 훈련시키는 사회가 하룻밤 사이에 자유인의 사회로 돌아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버트란트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가라는 것이 조금 있을 때는 즐겁게 느껴지겠지만, 하루 24시간동안 4시간만 일한다면,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모를 것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 경쾌하게 놀듯이 살아가는 능력이 예전에는 있었는 효율성이 숭배되는 분위기속에서, 그 같은 삶의 방식이 어느 정도는 금지되어 버렸다. 도시주민 들의 쾌락은 대개 수동적인 것이 되었다.  그들이 노리는 즐거움이란 영화를 보고, 축구경기를 관전하고, 라디오를 듣는 식이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의 능동에너지가 완전히 일에만 쓰였기 때문이다.”

 

비판자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돈벌이가 인간의 활동 가운데 가장 고귀한 형태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주요목표로서 가장 덜 해로운 것이다. 케인즈는 이렇게 표현했다. “ 돈을 벌고 개인 재산을 축적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위험한 기질들이 상대적으로 덜 해로운 길로 유도 수 있었다. 이러한 식으로 충족되지 않았다면, 잔인한 행위나 힘과 권력에 대한 무모한 추구, 자기 과시행위로 치달았을 테니까. 이러한 행동이나 기질을 충족시키기 위해 위험한 경기를 극한으로 밀고 나가도록 자극할 필요는 없다. 참가자들이 그 경기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우리가 주장하는 바는 옛 소련처럼 돈벌이가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규칙과 한계를 지키는 선에서 그 경기가 진행되어 사회가 좋은 삶을 벗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국가는 분명한 어떤 전망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취향과 이상을 지닌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원칙을 담아내는 곳이다. 경제학이란 인간이 자신들의 무한한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과정에서 제한적이거나, 부족한 자원을 어떻게 사용 할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욕구가 무한하다면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자원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욕구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결핍에 빠질 위험에 처했다. 부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부의 개념이다. 그러나 마셜이후 경제학이 태도를 바꾸었다.  “ 목적과 여러 용도에 사용 가능한 희소한 수단 사이의 관계로서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  경제학을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경제학을 이해하는 통상적인 정의다.  희소성을 경제학의 중심에 놓는다. 경제학이 다루는 범위는 어떤 목적을 위한 효율적인 수단을 연구하는 것이지만, 순전히 경제학자의 입장에만 선다면, 그 목적에 대해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항상 자연의 부족한 여건을 벗어날 수 없다면, 부족한 자원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효율성과 그 효율성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학문인 경제학은 늘 필요할 것이다.  희소성은 기복이 있다. 기근에는 극단적으로 물자가 부족해지고, 풍년이 되면 산물이 비교적 풍부해진다. 부유한 사회나 중간 정도의 소득수준에 이른 나라에서는 이제 굶어죽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러한 사실은 효율성이라는 개념의 사회적 중요성 및 경제학의 효용성도 줄었다는 의미이다. 우리에게 자신의 욕구를 필요에 맞춰 한정하는 능력이 있다. 문제는 경쟁적인 화폐경제가 우리에게 계속 더 많이 원하라고 압력을 가한다는 것이다맹목적으로 성장을 추구하다 보니 좋은 삶은 계속 다른 것들에 밀려나버린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책이나 다른 공동 행동양식의 목표는 건강, 존중, 우정, 여가 등 삶의 좋은 것들을 모든 사람이 쉽게 얻을 수 있게 해주는 경제구조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은 목표로 삼아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여분의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시간이 지나면서 경제학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변할 것이다.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문제는 점점 더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경제학자는 우리 삶에서 부단히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를 지배하는 대신, 삶의 주변적인 존재로서 자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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