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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물음이 답이다.(최용철)

인간은 무엇을 아는가?

데이비드 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명제가 과거에 관한 명제로부터 추리된다고 주장한다. 추리를 경험에 바탕을 둔 추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게 가정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일이다. 왜냐하면, 경험에 근거를 둔 모든 추리는 미래가 과거와 비슷할 거라는 명제를 기본전제로 하기때문이다. 경험을 근거로 하는 논증은 어느 것이든 과거와 미래가 비슷하다는 명제를 전제로 성립하기 때문에, 그런 논증으로 과거와 미래가 비슷하다는 명제가 입증되지 않는다.'  귀납추리에서 근거로 사용한 과거와 미래는 똑같다는 원리가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흄에 따르면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앞으로도 되풀이해서 똑같이 일어나리라 기대하는 것은 습관이 빚어낸 결과이다. 그는 습관을 '정신이 부르는 게으름'으로 부른다.  사람은 자연이 과거에 진행되었던 그대로 미래에도 진행하리라고 기대하는 타성을 지닌다.  결국 태양이 내일도 또 다시 동쪽에 뜨리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확실한 증거 없이는 결코 지식이 아니다. 과학에서 예측도 결국 기대심리에서 나오는 우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흄에 따르면 관념이 정신을 구성하고, 관념재료가 '인상'이다. 감각을 바탕으로 인상이 만들어지고 인상을 재료로 '관념'이 만들어진다얼마나 감각이 생생하느냐에 따라 인상과 관념이 서로 구별된다. 사람이 보고 듣고, 느끼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망하거나 의지하는 것은 감각에 따른 인상에서 유래한다. 감각에 따른 인상은 처음에는 생생하고 선명하다.  점차 시간이 흘러 인상은 희미해지고 관념이 남는다. 지금을 고통을 느끼는 감각은 인상이며, 이 감각이 기억으로 남으면 관념이다. 홉에 따르면, 한 관념은 또다른 관념을 도입하는 끈이다. 관념이 서로 연결되는 것은 관념이 지닌 성질이다. 이 성질은 유사성, 시간과 공간상 근접성, 인과성 세가지이다.

 

자아는 이러저러한 경험을 거치면서 시간에 따라 변화를 겪는다. 자아가 있으려면 경험이 있어야 한다도대체가 내가 누구냐는 물음 제기힐 때, 곧 내가 나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과 직접 관계 맺는 순간에, 나는 언제나 뜨거움이나 차가움, 사랑이나 증오, 고통이나 쾌락같은 지각을 발견한다. '어떤 지각도 없이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때란 없다'고 흄은 적는다. '나'는 서로 다른 경험이 연속해서 나타난 것으로, 그러한 그 무엇도 그런 경험을 묶어두지는 않는다. 경험은 그 누가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흄은 '인간이란 서로 다른 지각들로 뭉쳐진 다발이거나 집합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것은 생각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서로를 결합하며 언제나 상호운동을 하는 유동상태에 놓인다'라 말한다. 인간행위가 오로지 이성만을 따르지 않는다. 물론 욕구와 감정만으로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떤 욕구도 없이 단순한 이성만으로 행위할 수는 없다. 흄은 ' 이성으로 사물들 관계를 인식할 수는 있지만,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행위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은 욕구이다. 행위를 하는 목적을 정해주는 것은 이성이 아니고, 욕구이다. 이성은 감정에 복종하는 노예이다. 짐승에게나 인간에게나 본능으로서의 역할은 거의 같다. 어떤 행동을 유발하는 것이 도덕 판단에 부여된 의미이며, 목적이다. 내가 하는 행동은 현재상황이나 미래 상황으로부터 쾌락과 고통이 생겨나리라는 예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쾌락과 고통이 생겨나리' 라는 예상은 이성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감정이 관여한다. 흄에 따르면 어떤 행동을 덕스럽다 혹은 부도덕하다고 부르는 까닭은, 그 행동이 어떤 감정과 태도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혼외 정사가 올바르지 못한 까닭은 그 행위가 결혼관계에 나쁜 영향을 주기때문이다. 완벽하게 다른 사람 눈에 띄지않는 은밀한 혼외정사라면, 그것은 비난받을 만한 성행위가 아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과학과 수학을 학문의 모델로 삼았다. 언제나 올바르거나 아니면, 언제나 그른 분석명제와 달리, 종합명제는 어떤 경우는 올바르지만 어떤경우는 그르다. 그것이 올바른가 아니면 그른가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경험에 비추어 올바르거나, 아니면 그르다고 판정하는 개연성을 가진다. 형이상학 명제는 지식도 아니고 이론도 아니다. 지식이나 이론 그밖에 놓이는 만큼 그 올바름과 그름을 확인할 길 조차 없다. 과학지식이란 무엇인가?  과학사실과 법칙 및 이론 등이 그 요소이다. 19세기 과학을 사실 탐구로 여기며, 과학자는 사실 그 자체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사실 그 자체가 곧 과학이라는 등식이 성립했다. 우리가 파악한 대상이란 관찰을 통해 얻어진 대상일 따름이다. 게다가 관찰이란 언제나 관찰하는 사람에 따른다. 관찰사실이란 언제나 관찰자가 관찰한 사실일 따름이다. 서로 다른 이론을 견지하는 사람들은 같은 대상을 관찰하면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취한다. 같은 대상을 관찰하기에 앞서 서로 다른 이론을 가지면, 그 대상을 관찰해서 얻은 사실이 서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관찰이란 항상 선택에 따르고 이론에 따른다. 그 무엇을 관찰할 때에는 그 관찰은 이미 선행하는 어떤 지식을 따르기 마련이다. 과학에서 관찰이란 순수한 사실을 반영하는 관찰이 아니다. 무엇을 관찰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사실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이론에 따라 관찰하느냐에 따라 관찰사실은 얼마든지 달라진다. 과학이나 지나온 발자취는 서로 다른 특성이 조각처럼 연결된 변화무쌍한 과정이다.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 구조’에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은 모든 학문분야에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패러다임: 어떤 한 시대 사람들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 인식) 패러다임이란 어떤 특정기간 동안에 과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없이 받아들어지는 약속이다. 패러다임이란 곧 어떤 일정 시기에 그리고 일정사회에서 과학자들이면 누구나 지닌 믿음, 가치체계, 기술 등을 모두 아우르는 집합이다. 패러다임이 의심받는 상황이 발생되는 까닭은 지금까지 패러다임이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힘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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