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란 무엇인가? 사회는 자연이 아니다. 그러니 인간은 한편으로 살아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본능을 억눌러야 하는 이중 존재이다. 인간은 한편으로 자연에서 살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회에서 살아가야 한다. 자연과 사회는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홉스는 자연상태를 사회와 구별했다. 자연상태는 목숨 보존만이 절실해지는 극악한 상황이다. 자연상태에서는 어떤활동이든지 죽음을 피하고자하는 욕구에서 나온다.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도 결국 자기의 목숨 보존에서 연유한다. 특출한 능력이 있지 않는 한 이익을 독식하면서 살기란 불가능하다. 특출한 능력없이 살아가려면 서로 이익을 나누어야 한다. 서로 이익을 나누려면 상호신뢰가 있어야 한다. 서로 이익을 나눌때 사람들이 차지하는 몫은 혼자서 차지하는 몫보다 분명 적다. 그렇지만 상호 신뢰를 무시하고 혼자서만 이익을 차지 하려고 할 때, 감당해야 하는 손해는 막대하다. 세상 어느 누구도 독불장군일 수는 없다. 사람들은 상호의존관계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배반은 심각한 문제이다.
홉스는 스페인이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로 전쟁이 곧 일어날 것 같은 공포분위기에서 태어났다. 전쟁공포와 함께 바야흐로 경쟁에 바탕을 두는 새로운 시장질서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새로운 물음에 대답해야 하던 때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물음에 자기보존만큼 중요한 사항은 없다는 것이 홉스 대답이다. 갈릴레이에게 설명이란 복잡한 전체를 하나하나 분해하고, 그 하나하나를 전체로 합성하는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홉스는 복잡한 사회를 그 구성요소인 개별인간으로 분해한 다음, 그 개별인간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사회를 구성하는가를 설명한다. 홉스에 따르면 사람들은 타인들에게 끊임없이 거침없는 힘을 행사하려는 충동을 느끼며,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경쟁속에서 살아가며 공격을 일삼는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아무 제약없이 본성대로 살아간다. 자연상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은 채, 본디 그대로의 상태이다. 자연상태는 무정부 상태로 통치권력이 없는 상태이다.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는 곳이 자연상태이다. 서로가 경쟁하고 갈등하고 적대시하는 곳은 생존조차 어려운 상태이다. 자연스런 생존 욕구를 채우려는 가혹하고도 잔인한 경쟁이 벌어진다. 기본욕구 충족에 공격본능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뒤쳐진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앞지르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멈추게 하는 것은 죽음이다. 생존을 위해 인간 몸안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의욕이라고 한다. 이 의욕은 어떤 대상을 향할 때 욕구, 욕망으로, 어떤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할 때 혐오라 한다. 투쟁상태에서 덕목은 오로지 힘과 속임수 이다. 투쟁상태에서는 웃음마저도 비정한 생리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들은 언제나 먹느냐 먹히느냐의 긴장상태에서 지낸다. 어떤 행위든지 그것은 자기보존을 위한 행위이다. 그러나 자기 보존은 극악한 경쟁과 잔혹한 갈등만을 초래할 뿐이다. 그런만큼 자기보존을 위해서라면 새롭게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려고 상호합의에 따라 자유를 제약하기에 이른다. 자기보존을 위해서 스스로 자유를 제약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자유를 제약하는 상황이 홉스가 주장하는 사회계약상태이다. 홉스는 자기보존이 어려운 상태를 자연상태로 묘사한 반면, 통치권력이 정당화 되는 가설 상황으로 사회계약 상태를 제시한다. 국가는 그 구성원들에게 안전한 삶을 보장해야 한다. 생명을 보호해 주는 대가로 주권자는 신민들 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자연상태에서 자기들이 소유했던 권리를 포기하고, 그 권리를 법과 질서가유지되는 평화와 교환한다. 주권자에게 권력은 평화를 위한 것이고, 평화를 유지하여 고귀한 생명을 보호한다. 평화를 위한 판단은 주권자에 따른다. 도대체 무엇이 타당한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규칙을 제정하는 전권은 주권자에 따른다. 발생하는 모든 논쟁을 듣고 판결할 수 있는 권한은 주권자에게 주어졌다. 주권자에게는 부와 명예를 내릴 권한도 주어진다. 국가에 이바지 하도록 사람들에게 권장하느냐 아니면 국가에 해악을 끼치는 짓을 못하도록 억제하느냐는 주권자의 판단에 따른다.
신민들을 복종하게 만들어 평화와 질서를 가져올수 있다면, 진리여부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와 계약을 하고자 하는 본래 목적은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므로, 주권자는 생명을 양도하라고 명령하지는 못한다. 생명을 포기하라는 멍령은 계약이 지닌 본래 목적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신체를 보호해주지 읺는 계약은 무효이다. 자기를 해치려는 사람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도 무효이다. 국가를 보존하려면, 목적이나 용기가 없다면, 국가 제도는 공허해지기 때문이다. 주권자가 생명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모든 계약은 무의미해지고 공허해진다. 어느 누구도 자기를 보호해줄 수 없을 때, 자기를 스스로 보호하고자 하는 권리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계약은 자기보존이라는 목적에서 성립한다.
자연상태와 사회는 확실히 다르다. 자연상태에서는 자유로운 삶을 살지만, 목숨보존이 어려워지는 상태이다. 반면 사회생활은 국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자기보존을 보장받는 삶이다. 홉스가 주장하는 사회계약 상태는 특히 가부장제에 바탕을 둔 가설이다. 가부장체제 질서는 엄한 아버지가 자식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체제이다. 가부장 체제에서 아버지는 가족을 부양하고 보호한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무엇이 올바르고 그른지 가르치고, 그 가르침에 순종을 요구한다. 명령불복종에 대한 처벌을 강화할수록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행동해서 고통과 손해를 겪기 보다 자기 멋대로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고통과 손해를 겪지 않으려 한다. 순종과 복종을 먼저 배우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기독교 구약경전에 따르면 신은 선악을 알게 해주는 과일을 먹은 죄로 아담과 이브를 징벌했다. 에덴동산에 추방당해서 그들 후손은 영생을 상실하며, 죽음과 고난을 영원히 감수해야 했다. 과일 하나를 먹은 죄로는 너무 심하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불복종이다. 가부장체제는 세상이 위험하고 인생살이가 어렵다는 것을 배경으로 삼는다. 본래 이런 생각은 반항과 저항을 죄악시 한다. 울프는 국가의 권력과 개인이 누리는 자율을 분석하면서 두 개념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권력은 명령할 수 있는 권리이며, 자율은 자기 스스로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울프에 따르면 국가본질은 권력, 곧 통치할 권리이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첫 번째 의무는 자율, 곧 통치 받음을 거부함 이다. 그렇다면 자율과 국가권력이 서로 충돌할 때 방법이 없는 둣보인다. 따라서 울프는 자율이라는 덕목과 모순되지 않는 유일한 정치강령은 무정부주의라고 결론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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