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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물음이 답이다.(최용철)

인간은 존엄할까?

의무는 숭고한가. 생각해보면 인간은 온갖 제도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 제도중 하나가 이른바 도덕으로서 도덕제도이다. 철학자가 칸트는 세상 모든 것을 결과에 따라 좋다고 여겨지는 것과 또 결과와 무관하게 무조건 좋다고 여겨지는 것과 분류한다. 무조건 좋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자체 선으로 불린다. 이 분류에 따르면 행복이 무조건 선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과연 행복한가는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성향, 지능, 출생환경, 살아가면서 누리는 행운에 따라 다를수 있기 때문이다. 선택의지는 그 자체로 빛나며 스스로 모든 가치를 그 자체에 간직한다. 유용함과 무익함은 이 가치에 아무 것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도덕가치를 지닌 행위란 단순히 내가 하고 싶어서 한 행위가 아니라,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나오는 행위이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행위도 하고 싶어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결코 도덕적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그 행위를 칭찬할 수 없는 까닭은 물이 아래로 흐르다고 해서 칭찬받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칸트에게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이성존재이다. 이성존재란 이성명령에 따를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나는 이성명령에 따라 행위해야 한다.  이성명령은 단순히 경향이나 생활환경 등과 같은주변여건에 좌우되는 가언명령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어떤 조건도 붙지않는 이러저러하게 행위 하라는 정언명령이어야 한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행위규칙이 보편화 되기를 요구한다.  보편화된다고 함은 다른 사람을 자기와 똑같은 의지와 욕망을 가진 존재로 생각하여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칸트는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 존엄함을 강조한 철학자이다. ‘다른 사람들을 그들 자신으로, 목적으로 대해라. 결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는 정언명령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존재이다.

 

인간이란 자연에서 살아가면서 도덕법칙을 지켜내는 존재이다. 누구라도 다른사람에게 금지된 행동이 자기에게만 혀용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또 누구라도 자기이익이 다른 사람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뿐만아니라, 누구라도 다른 사람을 자기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칸트 의무주의는 칸트 지식론을 반영한다. 지식론이란 인간지식에 관한 이론으로서  인식론, 지식철학으로 불린다. 지식론에서 핵심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보이는 대로 세계로 나누는 이분법이다. 보이는 대로 세계는 현상세계이다. 인간은 언제나 두영역에 결치는 곤혹스런 운명을 겪는다. 인간 육신은 다른 물질처럼 인과법칙에 따르면서도 다른 한편 이성존재로서 자유롭다. 이성존재로서 자유로운 만큼 인간이 오로지 경험계에서 인과법칙에만 따라 산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게 칸트 주장이다.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된 최후 근거는 사물본질 자체이다. 사물본질 자체란 경험에 영향받지 않는 예지계 특성이다. 인간도 경험계 특성에 따른 고유한 성품을 지닌다. 예지계Intelligible world, 란 감각경험이 도저히 미치지 않는 상상으로만 가능한 순수한 세계이다. 주어진 외부현실로 말미암아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어 오로지 한 선택만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현실 경험계 행위는 언제나 불가피한 것 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예지계는 현실과 엄연히 다른 차원이다. 경험계에서 행위자에게는 실제로 했던 행위 말고, 다른 행위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예지계 인간은 차원이 다르다. 본래 인간은 현상계 인간에서 벗어나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다. 

 

칸트 이분법은 같은 사람을 두 사람으로 나눈다. 그 한 사람은 경험계 특성을 지니는 사람이다. 경험계 특성을 가진 사람은 현상계에 속한다. 현상은 자연법칙에 따라 다른 현상들과 연결된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예지계 특성을 지닌다.  이 예지계 특성은 경험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예지계 특성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다. 사람이 예지계와 현상계로 나누어질 때 자아도 둘로 나누어진다. 경험계 자아, 자아 그 자쳬 이 둘이다. 인간에게는 악에 기울어지는 자연스런 경향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경향 자체는 결국 자유로운 선택 의지로 물리쳐야 하고, 따라서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현상으로 경험계 자아는 악으로 기울어 지는 경향을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아 그 자체로 말미암아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극복할 수 있다. 칸트는 인간 존엄함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인간 존엄함을 도덕근거로 삼았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어쩌며 인간이란 언제든지 경멸받기 쉽기 때문에 존엄을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편협한 정신, 지치기 쉬운 신체를 소유한 나약한 인간존재에게는 다만 반어로 보일 따름이라고 쇼펜하우어는 해석한다. 쇼펜하우어가 내리는 결론은 이렇다. 문명사회 에는 기사, 성직자, 군인, 박사, 변호사, 철학자 온갖사람이 들끊는다. 그러나 실제와 외양은 다르다. 그들이 무엇으로 불리든 그것은 가면에 불과하다. 그뒤에는 대개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있는 자들이 숨어 있다. 정언명령은 자기물음을 자기물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 물음으로 간주하라는 요구이다. 그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 처지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성찰하라는 요구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누구라도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다. 여전히 나는 나로 남을 따름이다.

 

어떤 백인은 아프리카인에게 부족사회에서 양육된 아프리카인은 나와 다른 도덕관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아프리카인은 문화와 교육 등 유럽식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백인 주인에게 재산으로만 취급 받아야만 한다. 이런 백인에게 '아프리카인 처지에서 생각해 볼 수 없을까요'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백인과 아프리카인에게 서로 다른 처지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범법자와 재판관이 서로 다른 처지가 되어 보기를 요구하는 만큼이나 불가능하다. 내가 하고 싶은 행위가 내가 해야 하는 행위와 일치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 경우 나는 의무감에서 행위하기보다는 경향성에서 행위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경향성과 의무감을 한 인간 내면에서 명확하게 구별해내기는 불가능하다. '어떤 욕구, 느낌, 능력을 지닌 인간이냐'가 오히려  중요하다. 그래서 스스로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는 물음과 답변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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