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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물음이 답이다.(최용철)

인간이란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닐까?

니체는 인간이란 그냥 주저앉은 채 체념하지 말고, 무엇이든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 형이상학은 실재와 현상을 구분하면서 정신세계를 높이 평가하고, 물질세계를 비하한다. 변화하는 세계는 어느 한 해석만을 허용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해석만 있을 따름이다. 정신이나 이성, 사유나 의식, 정신, 의지,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쓸데 없는 허구다.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니며, 우리는 진실과 거짓, 실재와 현상 개념을 파악할 수 없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말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어떠한 안주도 거부하는 사람을 가르킨다. 안주란 편안하게 자기집에서 빈둥거릴 만큼, 부족함이 없는 상태이다. 편안함이란 결핍을 느끼지 않음이다.  결핍이 없음이야말로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냥  멈추어 있는 상태이다. 그대로 있고 싶어한다는 것은 어떤 변화가 있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어떤 변화를 두려워함이란 그냥 그대로 머물고 싶음이다.  지금의 삶을 바꾸려는 열망을 가진 짜라투스트라는, 이 세상을 구원인물이다. 그대로 머물러야 하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한 반복이다. 무의미한 반복이 끝없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물음에 대답하는 이가 짜라투스트라이다.

 

니체가 말하는 '위버맨쉬'는 인간을 초월하는 슈퍼맨 같은 존재가 아닌,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단계로서의 존재이다. 위버맨쉬는 니체가 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에서 나온다.

 

니체가 말하는 超人, 위버맨쉬는 인간을 슈퍼맨이 아닌 인간을 넘어선 또 다른 인간일 따름이다. 극복해야할 운명을 지닌 인간에게 또 다른 이름이다. 그대로 머물라는 외침은 독이요 화이다. 사람이란 그대로 머물지 말아야 한다. 소소한 행복에 만족스러워 하지 않는 사람이 짜라투스트라이다. 변변치 못한 행복을 겸허하게 껴안고, 그것을 일컬어 순종의 미덕이라 여기며 머물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나그네요, 산을 오르는 자다. 나는 평지를 좋아하지 않고 오랫동안 한 곳에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는 자다.' 사람들은 거짓가치와 황당한 말로 질곡속에서 살고있다. 세상에 맞서본 적 없는 사람은 도저히 느낄수 없는 절절한 고독으로 지내는 이가 짜라투스트라이다. 세상은 알지못할 수수께끼와 끔찍한 우연이 계속 이어지는 곳이다. 이처럼 변화무쌍하고 무의미한 반복의 세상, 그곳에서 살아남으려는 고독한 자가 짜라투스트라이다.

 

우리 이웃의 이타성을 칭찬하는 까닭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아야 내 이익이 커진다. 내 이익을 크게 하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자꾸 이타심을 칭찬해야 한다.  이타성을 강조하는 행동을 도덕이라고 자꾸 치켜세우면 세울수록, 내 이익이 점점 증대한다. 그렇다면 도덕이란 어떠한 집단을 또다른 집단이 공격할때 사용하는 강력한 무기다. 사회가 존재하는 까닭은 허약한 자들이 자기들의 약점을 보강하려고 집단체제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약한 자에게 결합하려는 경향이 있듯이, 강한 자는 분리하려는 자연스런 경향이 있다. 삶이란 예술과도 같다. 삶 자체가 각자에게 하나의 창조물이다. 니체는 인간행위를 지배하는 힘을 향한 의지는 거부할수 없었다. 힘을 향한 의지는 본능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 결코 종속하지 않으려는 본능이다. 삶 자체가 본래 강자가 부리는 횡포, 공격, 지배이며, 약자에게 그것은 억압이고, 고통이다. 힘없는 가장 온순한 자에게 그것은 착취일 따름이다. 니체는 살기 위해서 힘을 추구하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