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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셸리 키건, 박

자살에 관하여(1)

수명은 우리 통제력 범위 안에 잇다. 마음만 먹는다면 자살을 통해 우리 삶을 일찍 끝낼 수 있다. 어떤 경우에 자살은 허용가능한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자살을 적절한 선택이라 인정 할 수 있는가?  자살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증거라고 받아들인다.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해도 자살은 비도덕적인 행동이다.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면 종종 감정이 앞서기도 한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도덕성과 합리성의 개념을 구분하는 것이다. 나는 자살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를 따로 구분해두고, 이들을 서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리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한편으로는 합리성에 관한 문제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성에 관한 문제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합리성과 도덕성에 관한 질문에 대해 생각할 때 각각 서로 다른 잣대를 대려는 경향을 보인다.  합리성 차원에서 당연한 선택이라 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도덕성 관점에서도 수용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합리성의 개념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개인의 이익 추구가 자살의 합리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인정할 수 있다. 자살은 언제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을까? 죽는게 더 나은 삶이 존재 하는가? 그런 삶이 있다면, 지금 바로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는 판단을 신뢰할 수 있을까?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죽는게 더 나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차분하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자신의 판단을 신뢰해서는 안된다고 말 할수 있다. 사람이 지금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 처해 있는지, 그리고 변화로 인해 앞으로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 처하게 것인지 비교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변화로 인해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더 좋아졌는지, 더 나빠졌는지 판단 내리기 위해서는 두 상태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결론이 진실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비교 가능한 서로 다른 두가지 가능한 상태가 존재해야 한다.  자살을 할 경우 내가 처하게 될 특정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면, 뭔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특정 상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살을 통해 내가 이르게 될 비존재 상태는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상태가 아니다. 자살한다면 존재하기를 포기한 이다. 그러면 비교대상이 될 두 번째 상태가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죽는게 더 낫다고 판단을 내릴 있단 말인가? 죽음이 내게 나쁜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결국 살아서 존재하고 있는 지금의 상태가 더 좋다는 뜻 이다. 그런데 두 상태 요건을 받아들일 때, 살아있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 내리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과 비교 가능한 사후 상태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비존재는 여기서 말하는 상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두 상태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최악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생각을 할 때도 우리는 더 긴 삶과 더 짧은 삶을 비교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삶이 길수록 나쁘다고 한다면,  이 말은 죽은 이후의 상태가 지금 삶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지금 죽는다면 앞으로 이어질 나쁜 상태를 피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그 사람이 지금 죽는게 더 낫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죽는게 더 나은 삶이 존재하는 건지에 대한 문제는 인생의 행복, 즉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그러나 무엇이 최고의 인생을 만들어 주는지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은 저마다 다르다. 삶은 그 자체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중립적 그릇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오직 내용물에만 신경쓰면 된다. 삶 속에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이 얼마나 더 많은지 확인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나삶 자체에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가치적 그릇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계산은 복잡해진다.

 

삶에 담길 내용물이 전반적으로 부정적이라해도 살아있는 편이 더 나은게 될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체의 가치를 추가했을 때, 합이 플러스로 전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이들의 삶은 고통, 무능, 비참함과 실패로 가득하다. 이런 인생은 죽는게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죽는 것보다 더 나쁜 삶을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 삶이 너무 끔찍해 인생의 내용물이 사람자체의 가치를 모두 상쇄하고도 남는 그런 삶이 분명 있을 거라고 본다. 몸이 점점 쇠약해지다가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의 경우, 매일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고통을 견디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정원을 가꾸고 시를 쓰거나,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없다.

 

가치있는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점점 떨어지다가 결국 기본적인 생활도, 스스로 생활도 할 수 없게 되버리는 퇴행성 질병에 걸린 사람의 경우, 가치있고 생존에 필요한 활동을 앞으로 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고통과 비참함과 혼란을 느낀다. 고통과 무능력, 비참함으로 가득하게 남은 생의 전체 가치는 마이너스로 나올 것이다. 그렇게 악화되면 될수록 죽는게 더 낫다는 결론은 점점 더 진리로 다가가게 될 것이다. 삶이 죽는 것보다 더 나쁜 상황으로 이어지는 비극을 막기 위한 유일한 대안은 자살이다. 이성적 차원에서 나는 자살이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명료하게 사고할 수 있고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그래서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면 분명히 그럴수 있다. 어떤 시점의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더라도, 자살은 오직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만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애인이 떠났거나, 해고를 당했거나, 시험에 떨어졌거나, 심각한 사고를 당해 남은 생을 휠체어에서 보내게 되었거나, 이혼의 아픔을 겪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 자기 상황을 비교해 자신의 삶이 가치 없다는 섣부른 판단을 내리고 만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현재의 삶이 기대 만큼 가치가 높지 않다고 해도 죽는 것보다는 얼마든지 더 나은 인생일 수 있고, 어느 날 갑자기 상황이 함들어져 얼마나 더 버텨야 나아질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살은 치명적인 오판일 뿐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수 있다면, 특정 시점에서 자살은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그래프를 들이대면서앞으로 삶이 이러저러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면, 자살이 과연 합리적인 선택인지 분명히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할수 없는 상황을 떠올려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 직면해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게 더 낫다는 판단을 신뢰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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