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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셸리 키건, 박

죽음을 마주하고 산다는 것(1)

우리는 죽음에 대해 세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 부정하는 것, 인정하는 것, 무시하는 것이다.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어쩔수가 없다. 죽을 것을 인정하고, 사실에 직면하여 바람직한 방향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태도는 좋은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죽음에 관해 마음속에서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가장 좋은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죽을 운명이라는 진실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무시한다는 것은 합리적 이지 않은 태도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본질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해야 한다. 죽음에 관한 사실들은 여러분의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는 동기를 제공하기도 하고, 여러분의 행동을 바꾸도록 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죽음에 관한 사실들은 그것을 떠올릴 때 행동을 바꿔놓을 수 있다. 하지만 근거를 제공하지 않고, 여러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일 수 있다. 나는 죽음에 관해 생각할 때 적절한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죽을 운명을 늘 인정하고 있어야 한다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과 죽음의 본질에 대해 무시해야 한다는 것 역시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관한 사실과 우리 삶에 그것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기 가장 적절한 장소는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있는 바로 지금,  그리고 그곳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삶과 죽음에 관한 사실들을 바라보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인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아주 보편적인 것이다.  자부심도 두려움과 같이 감정이다.  자부심은 적절한 조건들이 갖추어졌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조건은 성취있고,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이 성취를 이루어야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 사건, 활동 또는 능력에 대해 여러분이 자부심을 갖기 위해서는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잘드러내야 한다. 여러분 자녀가 이룩한 성취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과 자녀 사이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다.

 

자녀들의 성공은 부모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부심이라고 하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이유는 어떤 감정이 타당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감정을 타당한 반응으로 인정하고, 그 감정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말하기 위해 즉,  그런 감정을 갖는게 당신의 상황에 따른 적절한 태도라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런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어야 한다죽음에 관한 두려움은 과연 타당한 감정이라고 말할 있는가? 두려움을 적절한 감정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두려워하는 대상이 반드시 나쁜 것이어야 한다편두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편두통을 두려워 할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석양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호랑이에게 잡혀먹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충분치 않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적절한 반응이 아니다.

 

가능성이 무시할 만큼 낮기 때문에 두려움은 정상적인 감정이 아니다. 결코 합리적인 반응이 아니다. 다음 조건으로 두려움을 적절한 감정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나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불확실해야 한다. 나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그 일이 어느 정도 나쁜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두려움은 적절한 감정적인 반응이라 볼수 없다. 두려움의 대상은 나쁜 것이어야 하고, 그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무시하지 못할 만큼 높아야 하며, 그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어야 한다. 나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 높지만 확실성은 없는 상황, 즉 두려움이 적절한 감정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가능성에 비해 두려움이 현저히 높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나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낮으면 두려움의 정도도 그에 따라 낮아야 한다. 두려움의 정도는 나쁜 일의 정도에 비례해야 한다. 

 

죽음을 두려워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정확히 무엇이 두려울까? 우리가 두려워 하는 대상이 무엇인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이 두려움의 대상일 수 있다. 고통스런 죽음이 두렵다면, 내가 고통스럽게 죽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어가는 과정보다 죽어있는 상태를 두려워 할 것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죽어있는 상태에서는 어떤 경험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살아있다면 누릴 수 있는 좋은 것을 빼앗기기 때문에 죽음이 나쁜 것이라고 박탈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때 두려워하는 대상은 '죽음에 따르는 박탈'이다.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적절한 감정이 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일어나는 상황이 불확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에 불확실한 것이 아니다. 두려움은 부적절 한 것이다. 물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확실성은 남아 있다. 그렇다면 조만간에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려워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 할만한 대상이라고 말하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측면은 죽음의 '예측 불가능성'이다.

 

죽음에 예측 불가능성이 없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적절한 감정이 될 수 없다. 두려움의 정도는 나쁜 일이 벌어질 가능성에 비례해야 한다.  젊은 나이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보면, 젊은이가 10년, 20년내에 죽을 가능성은 무시할 정도로 낮기 때문에 두려움이라고 볼 수는 없다. 두려움은 적절하지 않는 감정이라해도 분노, 짜증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있다. 상대방에게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그 사람에 대한 분노는 적절한 감정이 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가끔씩 사물에 대해서도 분노를 느낀다. 업무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컴퓨터가 말을 듣지 않을 때, 우리는 컴퓨터에게 화를 낸다. 하지만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감정인지 깨닫는다. 컴퓨터는 행위자가 아니다. 자신의 태도와 행동에 대해 어느 정도 선택권과 통제력을 가진 인간이 아니다분노를 적절한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위해서도 상대가 여러분에게 잘못을 저질러야 한다. 우리가 가져야할 바람직한 감정은 두려움도, 분노도 아니다.  대신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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