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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 한병철, 김태환 옮김)

우울사회(2)

우울증은 모든 유대를 끊어버리고 대상이 없고 따라서 지향점도 없다. 우울증은 멜랑콜리와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멜랑콜리는 어떤 상실의 체험 뒤에 온다. 따라서 멜랑콜리는 그나마 어떤 관계 속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슬픔은 강력한 리비도가 투여된 대상의 상실과 함께 일어난다. 슬퍼하는 자는 전적으로 사랑하는 타자와 함께 있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 속의 친구들은 마치 상품처럼 전시된 자아에게 주의를 선사함으로써 자아감정을 높여주는 소비자의 구실을 할 따름이다. 우울증 환자는 자기자신의 주체가 될 힘을 상실한 사람이다. 그는 주도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의 끝없는 반복에 지쳐 있는 것이다.  우울증이 긍정성의 과잉에서 오는 것이라면, 멜랑콜리는 히스테리나 슬픔과 마찬가지로 부정성의 현상이다. 우울증에 자주 선행해서 나타나는 소진은 자기자신의 주인이 될 힘이 빠져가는 주권적 개인의 증상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자기 착취의 병리학적 결과이다. 개성을 확장하고, 변형하고, 새로 발명해야 한다는 명령이 그 이면 에서 우울증을 초래하는데, 그러한 명령의 원천은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다. 에렝베르에 따르면 갈등은 건설적 기능을 수행한다. 개인적인 정체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체성 또한 갈등을 통해 응집되는 요소들로 구성 된다. 정치에서나, 사적인 삶에서나 길등은 민주적 문화의 규범적 핵을 이룬다.

 

정신분석학자 치료 핵심은 심리적 내적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데 있다. 즉 그러한 갈등의 재를 의도적으로 의식의 표면으로 끌어올리는데 있다.  결핍은 채워지고, 불감증에는 자극이 주어지고  충동은 조절되며, 강박행동은 억제된다. 성과주체는 자기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속에 빠지는 것이다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 모든 외적강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긍정성의 사회는 파괴적 자기 강제의 덫에 걸려든다. 21세기 대표 질병인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질환들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자리를 대신한다.

 

오늘날의 폭력은 적대적 이견에서보다는 순응적 합의에서 나온다. 성과주체는 외적 지배기구에서 자유로우며, 그것에 의해 노동을 강요당하지도 착취의 희생자가 되지도 않는다. 성과주체는 오직 자기자신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외적지배기구의 소멸은 강제구조의 제거로 이어지지 않고, 다만 자유와 강제의 가져올 뿐이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착취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더욱 가속화된 발전을 위해, 타자에 의한 착취에서 자기착취로 전환한다. 이러한 역설적 자유로 인해 성과 주체자는 가해자이자 희생자이며, 주인이자 노예가 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 한다.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영역을 낳을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 삶을 감싸던 서사성은 완전히 벗겨졌고 삶은 생동성을 잃어버렸다. 생동성이란 단순한 생명력이나 건강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것이다.  건강에 대한 열광은 삶이 돈쪼가리처럼 벌거벗겨지고, 어떤 서사적 내용도,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이상적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 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 뿐이다. 건강은 자기 관계적으로 되며 목적 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으로 전락한다.  성과사회는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도핑사회로 발전한다.  단순한 생명기능으로 환원된 삶은 무조건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하는 삶이다.

 

후기

이 책의 핵심 테제는 서양사회를 지배해온 부정성의 패러다임- 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타자에 대한 거부 등 - 한병철 교수는 이를 면역학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이 적어도 20세기 말부터는 긍정성의 패러다임 -능력, 자기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등-으로 전환되었거나,  전환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회가 푸코적 의미의 규율 사회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복종적 주체라고 한다면, 오늘날은 그 자리에 성과사회, 성과주체가 대신 들어선다.

 

성과주체는 자기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자 자신을 마모시켜 간다. 그 결과 스스로를 낙오자로 느끼는 우울증 환자도 넘쳐나고, 성과를 위해 약물도 불사하는 도핑주체도 증가하고 있다.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절대적 경쟁 (남과의 경쟁이 아니라, 스스로 끝없이 뛰어넘어야 하는 자기자신과의 경쟁)의 무대로 몰아가고 있다. 후기자본주의에 이르러 지배와 강제에 의한 타자착취에서 성공적 인간이 되기 위한 자기착취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타자착취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더욱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리 잡은 것이 바로 '자기착취'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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