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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 한병철, 김태환 옮김)

활동적 삶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인 삶’ 이라는 책에서 사색적 삶을 우위에 놓는 정통적 입장에 맞서 활동적 삶의 가치를 복구하고, 그 내적 다양성을 새롭게 표현하려고 시도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키는 노동사회로서 모든 가능성을 파괴해 버린다. 그녀는 개인의 삶이 근대에 와서 인류 전체를 지배하는 삶의 흐름속에 완전히 잠겨버렸으며, 오직 더 잘 기능할 수 있도록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는 것 뿐이라고 주장한다.  다윈 이래 인간은 동물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제 다시동물로 변신하려는 중일지도 모른다그녀는 모든 인간활동이 충분히 멀리 떨어진 우주의 어느 시점에서 관찰될 경우, 활동이라기보다 생물학적 과정으로 보일 것이라고 가정한다. 우주의 관찰자에게 기계화는 인간의 육체가 금속성으로 둘러싸여 가는 생물학적 변이과정으로 비칠 것이다. 마치 박테리아가 항생제에 반응하여 더욱 강한 저항력을 갖춘 종으로 변이해 가듯이 말이다.

 

노동사회는 개별화를 통해 성과사회, 활동사회로 변모해 갔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초조하고 부산한 상태에 빠지는가 하는 물음은 다른 대답을 요구한다.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미음 뿐만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인간의 삶을 극단적인 허무속에 빠뜨린다. 그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긴다. 노동하는 동물이 어떤 유에 속하고, 자신이 속한 유를 위해 노동하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동물다운 느긋함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기 근대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죽음의 기술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 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어켜야 할 종교도 이제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오늘날 진행중인 삶의 가속화는 존재의 결핍과 깊은 관계가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주인 스스로가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비록 세계의 미래가 사유思惟보다는 행동하는 인간의 힘에 좌우될 터이지만, 사유도 우리의 미래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 한다. 사유의 체험에 관해 잘아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카토의 경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겉보기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도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 있을 때만큼 덜 외로운 때도 없다'  아렌트가 인용한 부분에서 키케로는 광장과 북적대는 군중에서 벗어나 사색적 삶의 고독속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활동적인 삶이 아니라 사색적인 삶이야말로 인간을 인간 본연의 존재로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하며, 시선을 외부 자극에 내맡기기 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활동성이 첨예화 되어 활동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 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유 대신 새로운 구속을 낳는다. 오늘날 우리는 중단, 막간, 막간의 시간이 아주 적은 시대를 살고 있다. 활동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기계처럼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도 멈출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 간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일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곤 한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불안은 현존재 전체를 붙들고 흔들어 댄다. 분노는 예외적 상태이다. 세계가 점점 더 긍정적으로 되어가면서 예외적 상태도 더 줄어든다. 컴퓨터가 인간의 뇌보다 더 빨리 계산할 수 있고 , 엄청난 데이터를 조금도 토해내지 않고 받아들일 있는 것은, 어쩌면 컴퓨터에 어떤 종류의 이질성도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컴퓨터는 긍정기계다.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부정적 힘에는 단순함, 무력함, 무언가를 할 능력의 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무력함은 단순히 긍정적임 힘의 대립항일 뿐이다. 무력함은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결국 그 무언가에 대한 종속이며, 그 점에서 긍정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부정적인 힘은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는 이런 긍정성을 넘어선다. 그것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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