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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 한병철, 김태환 옮김)

피로사회

허먼 멜빌의 단편 ‘ 필경사 바틀비’에서 바틀비는 자기 자신이 된다는 목표를 이루지 못해 좌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그저 단조로운 필사 작업 뿐인데, 여기서 어떤 자기 주도적 활동에 대한 요구나 가능성이 생겨날 여지는 전혀 없다.  아직 관습과 제도 속에 살고 있는 바틀비는 우울한 자아 -피로를 초래하는 과중한 자아의 부담을 알지 못한다. 바틀비는 자기 자신을 지시하지도, 그렇다고 다른 무언가를 지시하지도 않는 형상이다.  그는 세계 없이 멍하고, 무감각한 상태로 존재한다. 그를 '백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가 세계나 의미와의 연관성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일 뿐이다. 바틀비는 한 때 죽은 우편물, 즉 배달 불가능한 우편물을 담당하는 관청직원으로 일한 적 있다는 묘한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끝을 맺는다. 삶의 심부름에 따라 이 편지들은 죽음을 향해 빠르게 달려간다. 이것이 아마도 소설의 중심 메세지 일 것이다.  바틀비의 실존은 죽음으로 향하는 부정적 존재이다.  삶을 위한 모든 노력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활동사회라고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해 간다. 도핑은 말하자면 성능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만일 스포츠에서도 도핑이 허용 된다면, 경기의 약학적 경쟁의 장으로 변질되고 말 것이다.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인 피로와 탈진상태를 야기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 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피로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피로는 폭력이다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한트케는 ' 근본적인 피로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탈진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근본적 피로는 영감을 주고,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피로의 영감은 무위에 관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한트케는 ' 나는 꼬마 녀석들이 놀면서 노곤해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 이상 탐욕도 없고 손에 움켜진 것도 없고, 그저 놀이만 했을 뿐이다. 깊은 피로는 정체성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이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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