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부족하니 문화가 달라지고 자기 파괴적인 문화는 다시 돈에 더욱 쪼들리는 상황을 부른다.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악순환 때문에 심리상태가 확연이 달라진다. 이런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은 야망이 작다. 아니 야망이라고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신념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그래서 아주 끔찍한 결과가 초래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일과 스트레스 때문에 하루 온종일 녹초 상태로 지낸다.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자신감이 부족하다. 많은 사람들이 연이어 다가오는 위기를 아슬아슬 하게 넘기면서 위태롭게 살아간다. 이 집단에 속한 사람들 끼리는 서로 도우지만 정부와 중상층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이용하려 하고, 모든 사회복지사가 속임수를 쓴다고 생각한다.
중산층 나라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환경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중산층 나라 아이들은 성장해서 대학에 진학하지만,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중상층 부모는 아이들 삶의 모든 부분에서 깊숙하게 개입한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학습경험을 제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숙제를 놓고 벌이는 전투는 일상적이다. 이런 방식으로 성장한 아이들은 제도가 정비된 세상을 항해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어른과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 알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안다. 또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방법을 알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빈민층 부모들은 교육을 잘 받은 계층의 아이들은 말할 수 없이 슬플 것이라고 생각한다. 빈민층 자녀 양육 방식은 전혀 다르다. 이들 가정에서는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를 가르는 벽이 더 높고 튼튼한 경향이 있다. 어른이 아이를 돌보는 일은 일찍 끝이 나고, 아이들은 아이들은 방과후 시간을 스스로 알아서 짜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어떻게 놀건 그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아이의 영역이지 어른의 영역이 아니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중산층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들의 칭얼거림도 가난한 계층에서는 드물다. 빈민층의 생활양식은 많은 것을 길러준다. 그러나 이 생활양식은 아이들이 현대의 경제방식과 사회 전반에 대비해 제대로 준비하도록 해주지 못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돈만 물려주는 것이 아니다. 습관과 지식, 자기계층의 인지적 특성까지 함께 물려준다. 아이는 유전자와 교양개발을 통해서 스스로를 강화하는 대대손손 대물림 되는 우월한 계층의 구성원인 셈이다. 소형 포유류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아빠없이 성장한 동물이 아빠와 함께 성장한 동물에 비해 신경연결망 형성이 늦고, 그 결과 충동 제어능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것은 돈이나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가 아니다. 가난과 가정 불화는 개인의 무의식, 즉 자기 미래와 자기가 사는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이런 차이가 쌓이고 쌓여 누구나 금방 알아볼 수 있는 차이를 만들어 낸다.
가난은 일자리 부족, 인정차별, 세계화, 문화적 전이, 불운, 정부의 옳지 못한 정책, 그 밖의 수많은 요인에 의해 비롯된다. 가난이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어떤 사람도 알 수 없다. 가난이 대물림 되는 현상을 어떻게 하든 개선하고자 한다면, 필요한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 인류는 이 세상을 환원주의적 추론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애써왔다. 사물이 어떻게 동작하는지 알려고 사물을 따로 떼어내고, 각 사물을 구성하는 요소를 분리해서 생각했다는 뜻이다. 알버트 바라바시는 "링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환원주의 덕분에 20세기에 이루어진 과학적 연구가 상당부분 가능 했다. 자연을 이해하려면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요소를 해독해야 한다고 환원주의는 주문한다. 이것은 구성요소를 모두 이해할 때 전체를 파악하기 쉬워진다는 가설을 설정하고 있다. 쪼개고 정복하라. 중요한 것은 각론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우리는 수십년 동안 세상의 구성요소를 통해서 세상을 봐야 했다.
이 접근법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한 인간, 한 문화 혹은 사회를 역학적 복합성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창발적 체계는 각기 다른 요소들이 한데 결합해서 각 부분의 합보다 더 큰 것을 만들어 낼 때 존재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전체의 각 부분이 상호작용을 한 결과 전혀 다른 것이 나타날 때, 바로 창발적 체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공기와 물과 같은 무해한 존재가 하나로 결합해서 무시무시한 존재가 우연히 나타난다. 지역의 정보 하나가 전 지구적 지혜로 이어질 수 있다. 변화가 전체 체계로 빠르게 전달되고, 전체 개체군의 정신은 새로운 환경을 활용하려고 자기자신을 재조직한다. 의식적인 판단으로 이런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개미들은 그저 일련의 새로운 설정이 나타나고 일단 어떤 관습이 나타나고 나면, 새로운 관습에 자동적으로 순응한다. 이러한 체계로 개미들은 하나의 집단을 스스로 건설한다. 사실 개미 한 마리 한 마리는 개체군의 전체 구조를 모를 수도 있다. 이들은 다만 자연적인 계기를 따랐을 뿐인데, 전체적으로 그런 결과를 빚은 것이다. 또 뇌가 바로 창발적 체계이다. 뉴런은 어떤 생각, 예를 들어 '사과'라는 생각을 담고 있지는 않다. 수백만 개의 뉴런이 점화하는 과정에서 사과라는 생각이 나타난다.
결혼한 부부가 결혼생활과 관련된 문제로 상담받으려고 진료실로 들어오면, 진료실에는 환자가 세명이 들어오는 것이라고 한다. 남편과 아내외 결혼도 그 자리에 함께 있다. 결혼은 아내와 남편 사이에 일어난 모든 일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그래서 어떤 선례가 형성되고, 이것이 아내와 남편 두 사람의 뇌속으로 스며들고 나면, 결혼 그 자체가 두 사람의 행동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것은 두 사람 사이의 공간에 존재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문화 역시 창발적 체계다. 미국 문화나 프랑스 문화 혹은 서구문화의 각 특징이 한사람에게서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수백만, 수천만 명의 행동과 인간관계 속에서 어떤 규칙성이 나타난다. 관습이 형성되고 나면, 미래에 태어나는 개인은 이 관습에 무의식적으로 복종한다. 가난도 역시 창발적 체계이다.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속시원하게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생태계 속에 어쩌다 가난에 발목 잡히고 말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어떠한 복잡한 행동도 선형적인 인간관계로 나타나는 것은 없다. 청소년 비행과 같은 중요한 결과론적 행위도 수만 가지 원인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각각의 원인은 다시 수만 가지 잠재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가난의 경우에도 구체적인 단편들이 아니라, 문화 전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세부사항에 개입하는 것으로는 아이든, 어른이든 간에 결코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문화, 전혀 다른 인간관계의 그물망을 제공 하면, 새로운 사고방식과 습관을 흡수할 것이다. 다른 문화권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갈 경우 새로 습득한 것이 대부분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교실은 지식을 전달하는 공간 일뿐 아니라 이웃이고 가족이어야 한다. 일단 긍정적인 문화적 계기가 마련되기만 한다면, 생산적인 영향력이 서로를 강화하면서 선순환의 고리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가난한 지역학교의 아이들은 어떤 까닭에서인지 모르지만, 산다는 것은 전투를 치르는 것이라는 관념이 머릿 속에 박혔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사람들을 적대시하면서 전쟁을 하듯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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