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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작동법( 에드워드 L. 데시,

세상에 두발로 서다.

사회화를 담당하는 교사와 부모, 상사는 학생과 자녀, 직원들이 사회의 유능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하지만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게끔 격려하는 역할을 맡는다. 인간을 수동적이고 야만적인 존재로 보는 시각에서 출발한다면, 내면화는 외적 통제를 행동에 새겨넣는 과정이 된다. 사회화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 인생의 각본을 써주고 사회에서 알맞은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에게 태생적으로 성장과 발달을 향한 성향과 활력, 심리적 욕구가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접근법에서 내면화는 아이가 주도적으로 외부의 지시를 내부의 지시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쓰레기를 버리라'는부모의 지시를 점차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나중에 지시가 없어도 알아서 내다버리는 아이는 규칙을 내면화 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내면화는 아이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부모의 도움을 받아 직접 이룬 것이 된다. 아이는 부모가 지운 책임을 받아들였다.

 

규칙과 그 아래 깔린 가치를 내면화하는 과정은 늘 확장되고 통일되는 자신의 모습속으로 세상의 다양한 측면을 통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유기적 통합'이라 한다. '쓰레기를 내다버리는' 사례에서 행동아래 깔린 가치는 가족의 생활이 원만하게 유지할 책임을 함께 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가 아이의 자아발달의 일부가 되어가는 과정이 통합이다. 남들과 연결되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시말해 관계를 맺으려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아이들은 타협을 해간다. 친밀한 집단과 사회가 요구하는 규칙과 가치를 받아들이려는 성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다. 아이는 그러한 타협을 통해 가치와 규칙을 내면화하여 능숙하게 사회적 역할을 해나가게 된다. 내면화의 두 유형은 '내사'(introjection)와 '통합'이다. 내사에는 내면화의 적절한 형태인 소화흡수 과정이 없다. 엄격한 규칙이 내리는 요구와 명령에 복종하는 상황이라면 '내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율적으로 행동할 토대가 마련되지 못한다. 자율적으로 움직이려면 내면화된 규칙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 자아와 통합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가치와 규칙을 받아들인 연후에 그에 따라 행동한다. 이 과정이 불완전하게 이어지면 내사로 이어진다. 해야 하는 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의 형태를 띤 내면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머릿 속에서 외부의 목소리가 울리며 명령을 내리는 것과도 같다.

 

의무감 때문에 순응하는 행동은 아이에게 여러모로 해롭다. 우선 학교생활을 즐길 활력과 열정을 잃어버린다. 그보다 더 가슴 아픈건 자기 자신에게 좋은 일을 찾기보다는 남을 기쁘게 하는 데만 골몰하게 된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렇게 조용하고 순종적인 학생들은 다들 모범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생님들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모범생의 겉모습 안에도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복잡한 감정들이(자신이 무능력하다는 느낌 등) 깊숙이 감추여져 았다. 화분에 씨앗을 심으면 싹이 트고 자란다. 그것이 씨앗의 본성이다. 싹이 트고 자라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씨앗이 나무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말라 죽기도 하고 때로는 썩기도 한다. 기후조건이 맞지 않거나 양분이 부족하면 자라지 못하는 것이다. 햇빛과 물이 있어야 하고 온도가 맞아야 한다. 그렇다고 이 요소들이 식물을 자라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씨앗이 타고난 대로 자라기 위해 꼭 필요한 자양분인 것만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타고난 방향으로 발달하기 위해서 심리적인 자양분이 필요하다.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내면화하고 통합하여 바람직한 삶을 살아가려면, 내면화를 뒷받침 하는 사회안에서 자율성과 자신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등 기본적인 심리적 요소가 충족되어야 한다. 아이들은 내면 통합을 이루면서 동시에 사회적 세상 속으로 들어갈 길을 찾아내야만 한다.아이가 얼마나 진실하고 책임감 있는 존재가 되느냐는 상당부분 '사회화 환경이 잘 뒷받침 되어 있느냐'에 달려있다. 사회화 환경이 아이에게 충분한 자양분을 주고 있는가?

 

부모들의 유형은 참 다양하다. 자녀에게 관심을 쏟지 않으면서 기대가 너무 큰 부모가 있고, 요구하는 것도 많고 비판적이기까지 하는 부모, 아이를 숨을 못쉴 정도로 억압하는 부모, 아이들을 존중하면서 격려하는 부모 등.... 학교의 가치와 규범을 얼마나 잘 내면화 하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숙제를 잘 했는가? 학교 활동에서 최선을 다하는가? 자율성을 북돋우면서 관심을 많이 보인 부모, 이를테면 숙제에 대해 물어보고 어려움이 있으면 도와주는 부모의 자녀들이 가치를 내면화 하는 정도가 높은 것올 나타났다. 자율성을 뒷받침 한다는 것은 곧 자녀와 학생, 직원들을 인간으로 대한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이들은 조종당하는 대상이 아니라 도와줘야 하는 가치 있는 대상이된다. 아이들이 재미없는 일을 해야 할 때, 왜 그 일을 해야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에게 바닥의 장난감을 치우라고 할 때는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사람들은 하기 싫은 과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참여를 이끌어내는 말을 할 때도 통제하거나 압박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명령하기보다 권유하고 통제하기보다 선택하게 해야 한다. 이유를 제시히고 그 감정을 인정하고 압박하지 않는다. 

 

우리는 핵가족의 일원, 좀더 큰 공동체의 일원, 사회의 일원, 더 나아가 지구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관계욕구야말로 우리를 사회화 과정으로 밀어내는 힘이다. 무리에 들어가면 그 무리가 우리 정체성의 일부가 되는데, 우리는 자연스럽게 무리의 가치를 받아들인다. 이것은 곧 책임감이 발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곧 타인의 행복에도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속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흡수하게끔 한다. 스스로 그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데 한몫하기도 하는데, 자신에게 의미 있는 다른 누군가가 자율성을 뒷받침 한다면, 그 과정은 더욱 순조로워진다. 우리가 흔히 '자신에게 진실하다'는 것은 곧 이기적으로 사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오해한다. 자율성을 북돋우라고 해서 그냥 방임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아직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 곧 자율성이라고 착각한다. 아이들이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며 건강하게 성장하게 하려면, 자율성을 복돋아 주어야 한다.

 

그러러면 먼저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게 해야 한다. 자율성을 존중하지만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한계를 정해주고, 그 선을 넘는 행동을 보일 때는 그 반응 또한 한결 같아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의 눈으로 아이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자녀의 행동에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든 무심히 지나쳐서도 안되고, 처벌만을 앞세우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아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이해 하려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율성의 한계와 결과를 분명히 해줘야 아이가 바람직한 행동을 하고, 자신을 스스로 규제할 수 있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책임감을 키울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부모는 아이의 발달을 도와줄 책임이 있다. 아이를 돌보는 사람은 어차피 어머니와 일로 맺어진 관계다.

 

우리는 가정과 직장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수 많은 부모들이 벅찬 업무에 시달리다보니, 아이들에게 마음처럼 시간을 내주지 못하고 자책감에 빠진다. 그리고 그 자책감을 달래볼 생각에 아이들에게 너그러워진다. 마찬가지로 고달픈 업무에 시달리지만 아이를 그대로 놔두지 못하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사사건건 비판하는 부모들도 있다. 정말 최악인 부모는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아이들에게 풀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아이를 그냥 방임하면서도 실은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있다고 저기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하며, 아이를 몰아세우면서 실은 자율성의 한계를 정해주고 있다고 자신을 기만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