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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작동법( 에드워드 L. 데시,

보상을 멈추면 동기도 멈춘다

물개쇼를 보면 보상이야말로 뛰어난 동기부여 기법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물개가 저렇게 효과적이라면 아이들, 학생들, 직원들에게도 효과가 있을거라 생각한다. 원하는 행동을 했을 때 보상하면, 그 행동이 반복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조련사가 사라지는 순간 물개 쇼도 끝난다는 것이 문제다. 자녀, 학생, 직원들이라면 생선을 던져주지않더라도 기대되는 행동을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  꾸준히 공부를 하고, 생산성을 높이고, 맡은 일을 지속적으로 하게 할 때는 문제가 복잡해진다. 어떻게 하면 그 방향성을 지속할 수 있을까?  원숭이를 걸쇠와 고리가 있는 상자를 주자 원숭이는 관심을 보이면서 어떻게 상자가 열리는지 알고, 열고 닫기를 반복한다. 아무런 보상도 없지만 호기심 많은 원숭이들은 문제해결에 매달렸다. 즐기는 것이다. 이것은 내면의 동기부여 때문이다. 원숭이들의 행동을 보면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이들의 활력은 왕성한 호기심에서 나온다. 아이들은 미지의 세상을 탐험한다. 아이들은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고 뭔가를 배우는데 목말라 있다.

 

아이의 내면에는 새롭게 맞닥뜨리는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생기로 가득차 있다. 어린 아이에게 학습보다 흥미로운 것은 없다. 배가 고프거나 부모가 놀아줄 때가 아니라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학습에 열중한다. 하지만 문제는 아이가 클수록 학습열은 온데간데 없고 사라지고 만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서너살 때와는 달리 공부에 관심도 열정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해밀턴 대학은 '보상과 행동수정이론'으로 유명한 심리학자 B.F. 스키너 모교다. 해밀턴 대학에서 나는 행동주의 원칙에 빠져 있었는데, 특정한 행동을 하면 보상을 준다. 가능한한 그 행동이 일어난 직후에 보상을 준다. 처벌보다 보상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보상을 할 때는 일정한 원칙을 따른다. 이런 행동주의 원칙은 일반사람들도 쉽게 호응한다. 보상을 얻기 위해 특히 돈을 벌어 성공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현대 사고방식에 적합하다. 사회에 더 많은 통제가 필요하다는 믿음도 행동주의 원칙과 잘 맞아 떨어졌다. 교육계에서는 성적에 등급을 매기고, 온갖 상을 만들어 학생들로 하여금 공부를 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환영한다.

 

무엇을 해야하는지 말해주고, 순종할 때 상을 주면 그만이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행동주의 철학자 배리 슈워츠가 전하는 메시지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수동적인 존재이며 보상을 받거나, 처벌을 피할 기회가 주어질 때만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이 성장을 하면 호기심과 활력은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아이들은 알기 위해 스스로 도전한다. 그리고 그 자체를 즐긴다. 아이들은 맥없이 기다리다가 보상이 주어지면, 수동적으로 학습에 참여하는 존재가 아니다. 능동적으로 학습과정에 뛰어든다. 학습에 대한 내면의 동기가 부여된 상태다. 동기부여는 자신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시켰어'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틀렸다. 동기부여를 현실에 유용하게 적용하려면 '내면의 동기부여'라는 개념을 받아들여야한다. 행동 그 자체가 즐거워서 보상이 되는 행동과정 말이다. 내면의 동기는 어린아이의 학습행동을 완벽하게 설명해준다. 만족과 즐거움을 얻기 위해 하는 여가활동도 그 바탕에는 내면의 동기부여가 적용하고 있다.

 

20세기 최고의 미술교사라는 로버트 헨리는 “진정한 예술작업의 목적은 언제나 평범한 존재의 순간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존재하는 것, 그 순간에 이르는데 있다”라고 했다. 어린아이들은 학습을 하면서 뭔가 다른 것을 성취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저 호기심을 느끼기 때문에, 알고 싶기 때문에 학습을 한다. 아이들의 학습에는 내면의 동기가 부여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보상이 없어도 기꺼이 해오던 행동에 보상을 주면, 내면의 동기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내적 호기심 때문에 시작한 행동에 외적보상을 주면, 사람들은 그 행동을 한층 더 즐기며 계속하고 싶어한다고생각한다. 흥미로운 보상을 제쳐두고 아무런 기대없이 퍼즐만 즐긴다면, 그것은 내면의 동기부여라 볼 수 있다. 금전적 보상을 받은 학생들은 자유시간을 즐기기 위해 퍼즐을 할 가능성이 훨씬 낮았다. 그들은 보상을 중단하자마자 퍼즐놀이를 그만두었다. 일단 보상을 받아본 사람들은 그 뒤로는 돈을 받기 위해 퍼즐을 한다. 처음에는 보상이 없어도 기꺼이 했던 활동인 데도 말이다.

 

금전적 보상을 받은 사람들은 신속하게 보상에 길들여졌고, 그 자체로 흥미로운 활동이었던 퍼즐은 보상을 얻기 위해 도구적 활동으로 변해버렸다. 어느 대학교 신문사에 무보수로 일해오던 학생들에게 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돈을 지급하지 않으면, 학생기자들의 활동 동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현장 실험에서도 퍼즐실험과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 일단 돈을 지급받기 시작한 학생들은 기자활동에 관심을 잃었고 보수가 중단되자, 더는 전처럼 열심히 활동하지 않았다. 분명 돈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 돈이 동기를 부여한다는 걸 누가 의심하겠는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자.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행동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보수가 충분하다면 범죄행위라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돈은 동기를 부여하지만 동시에 내면의 동기를 파괴한다. 부정적 효과가 많다.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보상 때문에 하는 놀이 행동은 외부로부터 통제되는 행동으로 바뀐다. 놀이가 일이 되자 놀이를 즐기던 주체는체스판의 말이 된다. 실제 현실에서 막대한 힘을 행사하는 돈은 대체 어떤 잣을 저지르고 있는 것인가?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드는 힘은 강압도 아니고, 왕의 군대도 아니다. 제왕의 자리에 오른 돈의 유혹적인 힘과 돈이 제왕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사회화 과정이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다. 대가는 자기 일에 진정한 흥미를 잃게 만든다. 일이 그저 금전적 보상을 얻기 위한 도구로 여겨지면서 한때 우리를 감싸고 있던 관심과 활력은 사라지고 말았다. 바꿔 말하면 금전적 보상으로 통제 당하면서 내면의 자아와 접촉할 길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통제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억업, 즉 힘과 위협을 통한 통제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렇게 힘을 동원하면 여러가지 부정적 결과가 생긴다고 믿는다. 독제자는 통제하지만 한편으로는 경멸 받는다. 하지만 돈도 역시 통제한다. 돈이 동기를 부여한다는 말은 '돈이 통제한다'는 말이다. 돈이 통제하는 곳에서 사람들은 소외되고, 해야한다고 믿는 일로 내몰리게 된다. 사람들이 내면의 동기를 상실하고, 어린아이들이 보이는 관심과 활력을 잃어버려 행동 자체를 위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로버트 헨리가 말한 평범한 존재, 그 이상의 순간을 느끼지 못한다. 바로 거기에 소외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