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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루덴스(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

놀이의 관점으로 살펴본 서양문명

특정 놀이 요소가 문화적 과정에서 아주 활발한 역할을 하고, 또 사회적 삶의 많은 기본적 형태를 만들어 낸다. 놀이적 경쟁 정신은 사회적 충동이라는 측면에서 문화 그 자체보다 더 오랜된 것이며, 실질적인 요소가 되어 삶의 모든 측면에 배어들었다. 의례는 성스러운 놀이에서 성장했고, 시는 놀이에서 태어나고 길러졌다. 음악과 춤은 순수한 놀이다. 지혜와 철학은 종교적 경기에서 유래한 말과 형태로 표현된다. 국가라는 제도는 창유리의 성애꽃처럼 시간의 표면위에 얼어있는 것으로서 예측할 수 없고, 덧없는 것이었다.로마제국도 불합리한 특성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신성한 권리주장으로 가장하려 들었다. 로마제국은 사회적, 경제적 구조에서 작은 구멍이 많고 빈약했다. 물자공급, 행정, 교육의 전반적인 체계가 도시에 집중되었다. 이것은 전체 공동체나 국가에 이득이 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공민권을 박탈당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이용해 호의호식하는 소수 집단에만 이득을 주었다.

 

제국의 통치구조는 노예국유화 체계, 착취, 직권 남용으로 인한 부정이득, 족벌주의, 서커스, 유혈적이고 야만적인 놀이들을 위한 인형극장, 방종한 무대, 신체를 상쾌하게 하는게 아니라 쇠락하게 하는 목욕탕 등으로 질식되어 갔다. 이런 것들 중 어느 것도 로마 문명을 굳건한 토대위에 올려놓고 지속시켜 주지 못했다. 그런 것들의 대부분은 단순한 쇼, 오락, 그리고 쓸데없는 영예를 위해서나 필요한 것들이었다. 정책 목표들 중에 아주 작은 부분만이 합리적이었다. 이런 비합리적인 성격은 제국이 존속하는 내내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새롭게 영토를 정복하는 것은 물자 공급용의 새로운 지역을 획득하여 번영과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뜻이었고, 공격 받기 쉬운 제국의 심장으로부터 제국의 경계를 더 밀어내겠다는 의도였다. 국민의 굶주림과 국가방위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제국의 권력과 영광에 대한 선망이나 갈망이 앞정섰던 것이다.

 

로마 사회는 경기 없인 존속할 수 없었다. 경기는 빵처럼 로마사회의 존립을 위한 것이었다. 경기는 신성한 행사였고, 그런 경기를 보는 사람들이 권리는 신성한 이권이었다. 경기의 기본적이 기능은 단지 공동체가 이미 얻은 그러한 번영을 축하하는데 있지 않고, 의례를 통하여 그런 번영을 강화하고 또 미래의 번영을 보장하는데 있었다. 대규모적이고 유혈낭자한 로마의 경기는 고대의 놀이요소가 쇠퇴한 형태로 살아남은 것이다.  사막의 모래 위에 지어진 수많은 새로운 도시들 중 원형극장을 짓지 않은 곳은 하나도 없었으며, 이런 원형극장은 세월의 풍상을 이겨내고 굉장히 단명했던 도시의 옛 영광을 증명하는 유일한 자취가 되었다. 인간과 야수의 유혈적 결투에 의해 진정되었던 로마제국의 대중적 열정은 전차경주로 대체되었다. 전차경주는 세속적인 즐거움의 행사가 되어버려 전혀 성스러운 경기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중적인 관심을 집중시켰다.

 

중세의 삶은 놀이가 넘치도록 가득했다. 사람들이 놀이는 기쁨에 차고 자유로웠으며 신성한 의미를 배제하고, 익살로 변해버린 이교도적인 요소로 가득했다. 장엄함을 과시하는 기사도의 놀이와 궁정 연애의 정교한 놀이 등이 있었다. 이런 형태들 중 극소수만이 진정한 문화 창조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림을 통해 1620년대 짧은 머리에서 긴머리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그리고 17세기 중반에 이르면 가발이 신사, 귀족, 의원, 변호사, 성직자, 상인 등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장식이 되었다. 심지어 해군제독까지도 축제 의상에 가발을 쓰고 다녔다., 가발은 1630년대와 40년대에 자연모발보다 더 많은 머리카락을 필요로하는 남자들의 머리스타일 때문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가발은 빈약한 머리카락을 가려주는 대체물로 시작되었고, 결과적으로 엉성한 자연모발을 위장해 주었다. 하지만 곧 가발을 쓰는 것이 공통의 유행이 되었다. 가발로 부족한 모발을 위장한다는 구실은 사라졌고 그 대신 스타일의 한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가발은 거의 출발점부터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양식이라고 하는 것은 놀이와 마찬가지로 리듬, 하모니, 정규적인 변화와 반복, 강조와 가락 등에 의해 비로소 생명을 지니게 된다. 패션에서 미학적 충동은 모든 종류의 외부적 감정들, 가령 남을 기쁘게하려는 욕구, 허영심, 자존심같은 것들과 뒤섞인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연습하던 음악이 이제 하나의 정규적인 직업이 되었다. 하지만 음악은 주로 예배나 축제적 목적을 위해 주문받아 작곡되었으므로, 오늘날 같은 명성을 누리지 못했다. 우리는 부르조아에 의해 내쫓긴 귀족들의 최초 문학모임을 감상주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감상주의는 그 시대의 모든 사회적, 교육적 이상을 담는 지적 보따리였다. 낭만주의자들은 실제 생활로부터 가져온 여러 상황에다 그들의 이상을 섞어 넣었다. 교육문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병상에서의 고통, 상중의 상태 묘사, 죽음과 소멸, 이 모든 것은 대중 독자들이 날마다 일용하는 정신적 양식이었다.

 

18세기에도 무미건조한 효율성과 사회복지의 부르조아적 인상인 공리주의가 사회 깊숙히 스며들고 있었다. 이런 경향들은 산업혁명과 그로 인한 기술분야의 발전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노동과 생산이 이 시대의 이상이자 우상이 되었다. 유럽 전역은 작업복을 입었다. 따라서 사회적 의식, 교육적 열망, 과학적 판단이 문명의 지배요소가 되었다. 19세기의 실험과 분석과학, 철학 개혁주의, 교회와 국가, 경제학 등 모든 것이 오로지 진지함 만을 추구했다. 사실주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그리고 기타 문학과 미술의 사상은 그 이전의 사상들과는 다르게 놀이를 배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