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호모루덴스(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

놀이, 전쟁 그리고 시

강아지들과 어린 소년들은 재미삼아 싸움을 하고, 일정한 규칙이 폭력 정도를 제한한다. 전쟁을 계획하는 정치가들은 그것을 권력-정치의 문제로 생각할지 모르나, 전쟁의 실제적 사유는 경제적 팽창 정책의 필연성이라기보다 자만과 허영, 위선에 대한 욕망, 우월성의 과시 등일 경우가 많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침략전은 누구나 잘 이해 하듯이 영광, 위신을 위한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고, 경제적 원인들과 정치적 동역학이라는 합리적, 지적 사유는 종종 뒤로 밀려났다. 개인간의 결투가 사법적 결투에서 유래했음을 증명하는 것도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 둘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위신을 지키기 위한 갈등이며, 위신은 곧 정의와 힘을 모두 포함하는 근본적 가치다. 복수는 자신의 훼손된 명예의식을 만족시키는 것이며, 변태적이든 범죄적이든 병적이든 수단을 가리지말고, 그 명예를 만족시켜야 한다.

 

국제법 체계는 더 이상 문화와 문명생활의 기반으로 인정되지도, 준수되지도 않는다. 국제사회의 어떤 회원국이 국제법의 구속력을 부정하고, 그들- 국가든 정당이든, 계급이든, 교회든, 뭐든- 의 이익과 권력을 주장하면서 그것을 정치행동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는 순간, 저 태고적부터 전해내려 오던 놀이의 정신은 사라지고, 그와 함께 문명의 흔적도 사라져버린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야만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원시사회의 폭력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서게 된다. 일등이 되겠다는 선천적 본능은 권력 집단들을 서로 충돌하게 만들 것이고, 엄청난 미혹과 광적인 과대망상 쪽으로 유도할 것이다. 역사 해석과 관련하여 그것을 불가피하고, 불변적인 경제적인 힘의 산물로 보는 어제의 해석이든, 혹은 남들보다 뛰어나게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에 새로운 과학적 레이블을 붙여주는 오늘의 세계적 해석이든, 그 바탕에는 언제나 승리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승리는 아무 소득도 가져다 주지 않는다. 고도로 발전되 사회에서는 종교, 과학, 법, 전쟁, 그리고 정치가 점차 놀이와의 관계를 잃어버리는 반면에, 시의 기능은 여전히 그 원천인 놀이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시를 창조하는 것은 실상 놀이의 기능이다.

 

논리적 조정과 구성의 힘이 아주 제한되어 있던 원시인들에게는 사실상 모든 것이 가능했다. 부조리한 생각, 허황됨, 끝없는 과장, 무책임한 모순, 변덕스러운 변형에도 불구하고, 원시인들은 신화를 불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놀이 분위기는 황홀과 열정의 분위기이고, 목적에 따라 성스러운 혹은 축제적인 분위기가 된다. 놀이의 행동 뒤에는 고양과 긴장의 감정이 뒤따르고, 이어 환희와 이완이 수반된다. 언어의 리드미칼 하고 대칭적인 배열, 각운과 유사운으로 의미의 핵심을 찌르는 것, 의미의 고의적인 가장, 어구의 예술적인 구성 등 이 모든 것이 놀이정신의 다양한 표현이다. 신화든, 서정시이든, 희곡이든, 서사시이든, 아주 먼 과거의 전설이든 현대의 소설이든, 작가의 목적은 의식,무의식으로 독자를 매혹시키는 긴장을 만들어 내어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모든 창조적 글쓰기의 바탕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긴장을 전달하기에 충분한 인간적, 감정적 상황이 깃들어 있다.

 

일반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에서 움직이며, 수수께끼 같은 말로 의미를 흐릿하게 하는 것을 선호하는 현대 시의 스타일은 예술의 본질에 충실하게 부응하면서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다. 시적 언어영역에서 서정적인 표현은 논리로 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반면, 음악과 춤에 가장 근접해 있다. 서정시는 신비스러운 명상, 신탁, 마법의 언어다. 여기서 시인은 외부로 부터 영감을 받는다는 느낌을 강하게 경험하며, 또한 최고의 지혜에 가장 가까워질 뿐 아니라 어리석음에도 가장 가까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