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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루덴스(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

놀이와 법률

 '법률과 정의'라는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단어들의 어원적 기반은 주로 설정하기, 고정하기, 확립하기, 선언하기, 임명하기, 유지하기, 질서잡기, 선택하기, 구분하기, 강제하기 등의 영역에 속해 있다. 판결을 내리는 판사는 가발과 법복을 벗는 순간 일상적 생활로부터 벗어닌다. 기능적으로 볼 때 가발은 원시부족들의 춤추는 가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면은 그것을 쓰는 사람을 다른 존재로 만든다. 현재 소송 사건에서 원고와 피고가 갑론을박 하면서 동원하는 스타일과 언어는 논증과 반대 논증에 몰두하는 스포츠맨과 같은 열정을 보여준다. 재판관을 앞에 두고 벌이는 소송은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켜야겠다는 각 당사자의 강력한 욕망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기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가 강하여 단 한 순간도 경쟁요소를 배재하지 않는다.

 

현대인이 볼 때 소송은 일차적으로 옮음과 그름에 대한 논쟁이다. 승리와 패배는 2차적 의미를 지닐 뿐이다. 하지만 원시사회의 정의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런 윤리적 가치의 강조를 잠시 잊어버려야 한다. 고도로 발전한 문명으로부터 덜 발달된 문화의 단계로 눈을 돌려보면, 윤리적, 사법적 개념인 정의와 불의는 승리와 패배, 즉 경쟁적 개념으로 대체되어 버리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원시사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정의와 불의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승리와 패배라는 구체적 문제였다. 원시사회에서 윤리적 기준이 다소 희박했다는 점을 이해하면, 정의는 상당부분 게임의 규칙에 복종하게 되었다. 승리하기 위한 갈등은 그 자체로 성스럽다. 그런 갈등이 정의와 불의의 개념으로 활성화 되면 법률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고, 신성한 힘이라는 긍정적 개념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신앙의 영역으로 승화된다. 법적절차에서 발견되는 내기 요소는 다음 두가지다.  첫째 소송 주역은 자신의 권리를 두고 내기를 건다. 즉 상대방에게 내기를 걸면서 자신의 주장을 반박해보려고 도전하는 것이다. 둘째 소송 그 자체에 대한 내기와는 별도로, 영국에서는 일반 대중이 법정에서 혹은 법정 바깥에서 소송 결과를 두고서 내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문명이 진화하더라도 외양으로는 여전히 말싸움인 것이다. 고대 말싸움에서 결정적 승기를 안겨주는 것은 잘 고안된 법적 논증이 아니라, 가장 악랄하고 무자비한 욕설이다. 페리클레스와 피디아스의 아테네에서 사법적 웅변은 수사적 교묘함을 뽐내는 경기였고, 그러다 보니 온갖 인위적 설득 방법을 허용했다. 법정과 대중 상대의 연단은 웅변술을 배울 수 있는 장소로 인식되었다. 로마에서도 상대방에게 소송을 걸어 파괴하는 방식이 오랫동안 합법적인 것으로 허용되었다. 소송에서 좀 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고, 소송 당사자들은 상복을 입었고 한숨을 내쉬고, 흐느껴 울었으며, 공공의 복지를 위해 소송을 한다고 소리쳤다. 또 자기들에게 유리한 증인과 손님들로 법정을 가득 메웠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오늘날 법정에서 법률가들이 하는 행동을 모두 했다. 법률가 리트만은 아비시니아 법정 참관기에서 이렇게 썼다. "잘 준비된 아주 능숙한 수사법을 발휘하며, 검사는 자신의 공소장을 읽어 내려갔다. 유머러스한 공격, 풍자, 교묘한 비유, 속담, 날카로운 조롱과 차가운 경멸 등을 동원했고, 필요한 곳에서는 활기찬 제스처를 내보이고, 강한 고함을 지르면서 자신의 기소내용을 강조했고, 피고를 제압하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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