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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루덴스(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

놀이의 본질과 의미1

인류는 자기 자신을 호모사피엔스,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불렀다. 현대인들은 인류를 호모파베르, ‘물건을 만들어내는 인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인간과 동물에게 동시에 적용되면서 ‘생각하기’와 ‘만들어내기’처럼 중요한 제3의 기능이 ‘놀이하기’다. 그래서 호모사피엔스와 같이 호모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인류지칭 용어로 제안한다. 놀이는 문화적 현상이다. 동물들은 인간과 똑같이 놀이를 한다. 강아지들의 즐거운 놀이를 유심히 지켜보면, 거기에 인간의 놀이에 깃든 본질적 측면이 모두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아지들이 이처럼 뛰어노는 것은 동물놀이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다. 물론 훨씬 잘 조직된 형태의 다른 놀이도 있다. 가령 개들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정기적으로 경주를 하거나 멋진 공연을 해 보인다.

 

놀이는 순수한 신체적, 생물적 활동의 영역을 훌쩍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의미심장한 기능인데 부연해서 말해보자면, 놀이에는 어떤 의미가 깃들어 있다. 심리학과 생리학은 동물, 아이, 어른들의 놀이를 관찰하고, 묘사하고 설명한다. 이 학문들은 놀이의 본질과 의미를 결정하고, 그것이 일상생활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부여한다. 어떤 학자는 “놀이란 어린이를 훈련시켜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감당해야 할 진지한 작업을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학자는 놀이를 특정 기능을 구사하려는 내적 충동, 혹은 남을 지배하고 경쟁 하는 욕망 등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가설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놀이는 놀이 그 자체가 아닌 어떤 것에 봉사하고, 생물적 목적을 갖고 있다는 가정이 그것이다.

 

생물학적 분석으로는 놀이의 열광과 몰입을 설명하지 못한다. 열광, 몰입 등에 놀이의 본질 혹은 원초적 특질이 깃들어 있다. 놀이의 재미는 각종 분석과 논리적 해석을 거부한다. 그것을 하나의 개념으로 볼 때 어떤 심리적 범주로 환원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튼 놀이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이 ‘재미의 요소’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일차적인 범주와 만나게 되는데, 이것은 누구에게나 친숙하고 심지어 동물의 수준에서도 발견된다놀이를 동물이나 어린아이의 생활에 나타나는 행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기능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생물학과 심리학의 경계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문화를 예의 주시해 보면, 놀이가 문화의 정립 이전부터 당당한 크기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이어 선사시대의 초창기부터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문화를 수반하면서, 그 속에 침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어 덕분에 인간은 사물을 구분하고, 정립하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사물에게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그것들을 정신의 영역으로 격상 시켰다. 말과 언어를 만들어 내는 정신은, 이 놀라운 명명 기능을 가지고 놀이를 하고 있다. 모든 추상적인 표현 뒤에 은유가 깃들어 있는데, 이 은유라는 것이 실은 말을 가지고 하는 놀이다. 시詩의 세계를 창조했다. 놀이는 비물질적 활동이라 할 수는 있지만, 도덕적 기능을 가진 활동은 아니다. 선과 악의 평가기준은 놀이에 적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놀이를 아름다움에 연결시켜 주는 연결고리는 다양하면서도 상호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렇지만 놀이 그 자체에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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