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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데이비드 몽고메리 지음, 이수영

미래를 위하여2

 

작물재배를 개선하기 위해 품종개량과 작물재배 연구에 상당한 투자를 했지만, 우리는 기껏해야 쌀 생산량이 더 줄지

않도록 유지했을 뿐이다. 다가오는 미래에는 한해 생산량이 1% 넘게 늘어야만 밀, 쌀, 옥수수의 예상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까지도 식량생산을 늘릴수 있는 새로운 기술혁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20세기 후반에 식량생산이 곱절이 된 건 대부분 질소비료 사용이 일곱 곱절, 인 비료사용이 세곱절 늘어난

덕분이다. 이런 과정이 단순하게 되풀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비료를 준다해도 농작물은 이미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생물학적으로 쓸모가 있는 질소와 인이 흙에 과잉 공급되어 있다면, 비료를

세곱절로 더 준다고 해도 크게 도움이 안된다. 식량을 수경재배하면 천연의 흙에서 가르는 것보다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훨씬 많아진다. 그러나 수경재배 방식은 양분과 에너지가 외부에서 대량 투입되어야 한다. 이는 소규모

노동 집약적인 농장에서 효과가 있을 수도 있지만, 대규모 시설에서는 화석연료와 다른 어딘가에서 채취한 양분이

지속적으로 어마어마 하게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에, 세계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쉽고 가장 큰 수확량 증가는 식물교배로부터 이미 달성되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자연선택에 종속

되어 있는 고정된 유전자풀에서 수확량을 늘리려면, 진화가 부과한 생리학적인 한계를 건드려야 한다. 그리고 자연

환경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새농업의 철학적 기초는 흙을 화학적 체계가 아니라 지역마다 다양한 생물학적 체게로 다루는데 있다. 그러나

농업생태학은 그저 노동집약적인 영농방식으로 되돌아 가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최신 유전자조작기술 만큼이나

과학적이지만 화학, 유전학이 아닌 생물학과 생태학을 기초로 한 것이다. 흙, 물, 식물, 동물 그리고 미생물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뿌리를 두고 있는 농업생태학은 표준화된 상품이나 기술을 이용하기보다 지역조건과 환경을

이해하는데 더 기대고 있다. 농업생태학은 대농장 말고 꼭 소농장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아이티의 영세소작농들은 미국 남부 대규모 노예노동 플랜테이션 만큼이나 어마어마 하게 가파른 비탈의 흙을 파괴했다.

또한 그저 기계화가 문제인 것도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단순하다. 흙이 보충되기보다 빨리 흙을 잃는 농법은

사회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생산력이 높은 농장들이 돈을 쏟아붓지 않아도 농사를 지을 방법들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그 일을 하는 곳에 맞게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방법의

실마리는 노동집약적이고 기술집약적인 농업사회의 경험에서 찾을수 있다. 노동집약적인 체제에서 사람들은

땅에 적응하려 한다. 기술집약적인 체제에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땅을 기술에 맞추려 한다. 흙의 유기물질을

늘이고, 산비탈에 계단식 논밭을 만들고, 중요한 양분을 재순환시키는 방법으로 흙에 투자하는 노동집약적인 경작은

중국, 안데스 산맥, 아마존강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이어져 왔다. 흙을 소비재로 여기는 기술집약적인 체제에서는

흙의 비옥함과 단기 이익을 되도록 빨리 많은 것을 흙에서 뽑아냈다. 농업에서 가장 값싼 투입물인 흙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평가절하 되면 언젠가는 때가 너무 늦어진다.

 

방법이나 관습을 바꾸려면 무경운 농법처럼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무경운 농법은 흙의 침식을 지연시키는데

효과적이고, 전통농법과 유기농법 모두에 적용할 수 있다. 질소와 인의 정확한 투입량과 흙의 유기물질과 비옥함을

유지하는 방식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 기업이 강요하는 유전공학이나 집중적인 비료살포 같은 농법은 기업상품에

대한 의존을 키우는 방법이다. 농업의 토지 윤리를 뒷받침하는데 높아지는 관심은 슬로푸드와 지역농산물 먹기

운동으로 나타난다.

 

농산물 생산과 소비 사이의 거리를 줄이려는 운동이다. 하지만 식품이 식탁에 도착하기까지 드는 에너지 효율에

관한 고민은 급진적이고 새로운 것이 아니다. 로마 사람들이 지중해 부근에 곡물을 선적한 이유는 식량을 멀리 실어

나르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바람이 공급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북아프리카, 이집트, 시리아가 로마를 먹여 살린 이유다.

산맥을 넘어서 이탈리아 중부까지 서유럽 농산물을 끌고온다는 것은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석유가

점점 비싸짐에 따라 지구 반바퀴를 돌아 식량을 운반하는 것은 합리적인 방법이 아니다.

 

미국의 수퍼마켓에서 팔리는 평범한 농산물은 2400 킬로미터가 넘게 운반된다. 먼 앞날을 내다볼 때 우리가 흙과

탈석유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면, 식품시장은 더 작고 글로벌 경제에 덜 포섭되어야 하며, 반드시 더

싸지는 않겠지만, 지역시장에서 지역생산물을 팔아야 더 잘 운영될 수 있다. 다른 어딘가에서 생산된 식품을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일이 날이 갈수록 비용이 더 많이 덜기 때문에, 식량생산이 사람들에게 가까워지는 다시 말해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훨씬 이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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