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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데이비드 몽고메리 지음, 이수영

신대륙과 플랜테이션

숲이 베어지면서 흙은 사라졌고, 사람들은 밀림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새땅을 개간한 것이다. 숲언저리에서 몇 킬로미터 들어가니 농가와 작은 마을은 사라지고 소를 키운는 목장이 나왔다. 자급농들이 숲속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버려진 농장들은 목장주들이 차지했다. 너무 척박해서 작물을 기를 수 없는 땅이지만, 암소들이 풀은 뜯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암소들을 먹이려면 넓은 땅이 있어야 한다. 수많은 소떼가 풀을 뜯으면 숲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침식이 심해진다. 그러면 마을들은 새땅을 찾아서 끝도 없이 밀림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산림개간, 농사, 소의 방목이라는 오늘날의 사이클은 겉흙을 벗겨내고 비옥함을 되살리는 흙의 생명력을 거의 앗아갔다. 그 땅에서는 사람들이 거의 살 수 없게 되었다. 생산적인 땅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딴 곳으로 갔다.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발견했을 때 전체 아메리카 대륙에는 4천만명에서 1억명의 사람들이 살았다. 북아메리카에 살던 사람들은 400만명에서 1천만 명이었다. 대서양쪽 해안지대에 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땅을 적극적으로 관리했지만, 정착해서 농사를 짓지는 않았다. 초기 식민지 개척자들은 원주민들이 초기 유럽사람들과 아마존 원주민들처럼 숲을 조금 개간해서 농사를 짓다가 몇 해마다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전한다. 토질 저하와 침식이 북아메리카 동부를 바꾸어 놓기 시작한 것은 식민지 개척자들이 땅을 이용하는 방식을 확립하면서 부터였다옥수수를 집약적으로 재배하자 양분이 모자란 뉴잉그랜드의 빙적토가 금새 고갈되었다. 몇 십년만에 식민지 개척자들은 숲에 불을 놓아서 그 재를 밭에 거름으로 주었다. 땅은 줄어드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남부사람들보다 더 빨리 새 땅이 부족해졌다. 남부에서는 담배농사가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의 노예기반 경제를 끌고갔다. 토지 고갈은 담배농사에서 나타나는 뚜렷한 특징이었다. 토지를 고갈시키는 이유는 수익이 높은 작물을 재배해야 하는 경제적 필요에서 비롯되었다.

 

담배는 흙을 완전히 노출시키는 작물이다. 농부들은 괭이나 말 한 마리가 끄는 가벼운 쟁기로 담배 모종 둘레마다 흙을 돋우었다. 이렇게 두면 여름철 비바람이 불때 담배잎이 나기도 전에 맨흙이 빗물에 침식된다. 땅에 분명히 해를 입히면서도 담배는 딱하나 장점이 있었다. 다른 어떤 작물과 비교하든 여섯 곱절이 넘는 값을 받을 수 있고, 대서양을 건너는 오랜 여행을 견뎌낸다는 점이다. 다른 작물들은 거의 운반과정에거 썩거나 운임비를 뽑을수 있는 값에 팔수가 없었다. 담배가 이렇게 큰 수익을 내자 식민지 경제는 다양한 작물을 심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버지니아 사람들은 자기 식구들이 먹을 만큼만 농사를 짓고 남는 에너지를 담배 재배에 쏟아부어서 유럽시장에 팔았다. 

 

새 땅은 꾸준히 개간되었고 오래 쓴 땅은 버려졌다. 담배는 다른 농작물에 비해서 흙속의 질소를 열곱절 넘게, 인을 서른 곱절 넘게 빨아들인다. 담배 농사를 다섯해만 지으면 땅에는 양분이 거의 남지 않아서 다른 작물이 잘 자라지 않는다. 식물 군락이 뿌리 뽑인채 버려진 밭은 여름철 집중호우때 협곡으로 변해갔다. 해안을 따라 흙의 비옥도가 떨어지자 농부들은 다시 내륙으로 이주해 갔다. 1763년 평화조약으로 당장 서쪽 땅에 진출할 길이 가로막히자 농부들은 잉글랜드 본국에 분노했다. 담배세 인하요구와 서부 진출이 가로막힌 현실을 둘러싼 불만이 수그러들지 않으면서 영국통치에 대한 반발이 폭발했다. 과잉공급과 전량을 잉글랜드로 수출해야 한다는 조건 탓에 가격이 많이 떨어졌지만, 식민지 농업은 남부에서 변함없이 담배에 집중했다. 18세기 중반즈음 정부관세는 담배판가 가격의 80%를 차지했다. 농장주들의 몫은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담배 법규와 판매, 수출조건이 불평등하다는 인식이 퍼져 부그부글 끊다가 마침네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담배가 그렇게 땅을 고갈시키는데도 소유주들은 구태여 땅의 생기를 되살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땅이 주는 것을 받기만 하고, 땅이 더 내놓지 않으면 땅을 버린다. 기름진 땅을 아무 생각없이 낭비하는 모습을 보고 값싼 노동력에 길들여져 있고, 기름진 땅이 모자라는데 익숙한 유럽사람들도 당황했다. 부유한 지주들은 일반적으로 담배를 재배하면서 땅을 고갈시키고, 노예를 부려 새 땅을 개간하게 한 뒤 옛땅에는 생계대책이나 노예가 없는 농부들에게 팔아서 담배농사를 짓게 했다.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은 자기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이웃농장에서 사곤 했다. 목화와 담배가 농사의 전부이다 보니 남북 전쟁 전에 남부는 곡물과 채소, 가축을 전량 수입했다. 1832년 남부에서 에드먼드 러핀의 '석회질 거름에 대하여'가 출간되면서, 미국 농업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라핀은 비료의 힘으로 흙의 비옥함을 되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화석조개 껍데기를 부수어서 밭에 주었더니 옥수수 수확량이 거의 반이 늘었다. 라핀은 다른 땅에도 이 회토를 주기 시작했고, 수확량이 거의 곱절이 늘어났다.

 

남부에서 흙의 침식이 심각해지면서 남북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모두 남북전쟁이 노예제도를 둘러싼 갈등이었다고 배웠지만, 우리가 배우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남부 경제를 특징지었던 담배와 목화의 단일경작이 이익을 내기 위해 노예노동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문화적 관습을 넘어서 노예제도는 남부의 부를 뒷받침하는데 꼭 필요했다. 남부가 농업사회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북부의 많은 부분도 농업사회였다. 노예제도는 남부전역에 통적이었던 수출 중심의 상품작물 단일경작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