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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데이비드 몽고메리 지음, 이수영

식민지를 찾아서

오늘 날 우리는 북아프리카를 고대 세계의 곡창지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곡물이 기원전 330년에 그리스의 기근을 구제했고, 로마가 카르타고를 정복한 것도 어느 만큼 그 경작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로마사람들은 축산, 돌려짓기, 거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흙이 어떻게 해서 침식되었을까? 농사를 지으려면 수입 가운데 어느 만큼 흙의 비옥도를 높이는데 써야 하지만, 수확량을 최대화 하려면 흙이 양분을 다 써버려야 한다. 게다가 빚이나 굶주림에 허덕이는 농부에게는 당연히 토질이 저하된 땅에서라도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내려 한다.  마야 농업의 시작은 화전농업방식이었다. 밀림 일부분을 돌도끼로 쳐낸 뒤 불을 놓았다. 그리고 불을 지른 후 뒤 옥수수와 콩을 심었다. 벌목한 숲이 불에 타서 생긴 재가 흙을 기름지게 함으로써 몇해 동안 풍작이 이어졌다. 그 뒤 양분이 사라진 열대의 땅은 급속도로 비옥도가 떨어졌다. 개간한 땅에서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려,면 땅을 묵혀서 밀림이 회복되어야 땅이 살아났다.

 

고대제국들이 주는 공통된 깨우침은 생산성을 꾸준히 높이는 기름진 흙이 모자란다면, 혁신적인 방법조차 어쩔수 없다. 사람들이 땅을 보호하는 한, 땅은 사람을 지켜준다. 반대로 땅의 기본적인 건강을 무시하면 문명은 점점 사라진다. 침식과 토질고갈의 가혹한 결과 때문에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로마, 그 뒤 여러 문명이 서구에서 나타났다 사라진 것처럼. 오늘 날 세상을 먹여살리려는 노력에는 문화혁명, 새로운 농업기술혁명, 또는 자급농에게 토지를 재분배하려는 정치혁명에 대한 요구까지 포함된다. 농경방식의 발전 덕에 더 적은 수의 농부가 더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가 있다. 하지만 땅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먹일수 있느냐는 결국 흙의 건강이 결정한다. 충적평야는 강이 주기적으로 범람할 때마다 꾸준히 양분을 얻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다른 땅에서는 땅을 기름지게 하려는노력없이는 꾸준히 수확할 수 없다. 사람들은 유럽 고대의 숲을 처음으로 개간함으로써 만든 작은 경작지에서 한 번에 몇 해씩 농사를 지었다.

 

불에 타서 재가 된 숲은 새로 일군 밭의 거름이 되었다. 이 덕분에 초기 수학량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땅의 힘이 줄어들자 이주라는 어려운 결정을 해야 했다. 토질이 고갈된 밭을 버리자 묵은 밭에서는 먼저 풀이 돋아나고, 그 뒤에는 딸기나무가 그리고 마침내 숲이 되살아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몇해 동안 경작되었다가 몇 십년 동안 묵힌 땅은 점점 숲으로 변해가면서 땅이 힘을 되찾았다. 그 덕분에 몇십년이 흐른 뒤에는 다시 숲을 개간하여 작물을 기를 수 있었다. 여덟 아홉가지의 기본 종류의 흙 가운데 가장 좋은 흙은 무기질 흙이 식물 군락과 섞여있는 기름진 겉흙이었다. 풀을 걷어냈을 때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그 모습을 드러낸 흙을 처녀지라고 한다. 그것은 깊이가 30센티미터 정도 되고 그 밑으로 빛깔이나 질감이 뚜렷하게 다른 층에 이르게 된다. 이 지표면의 부식토가 가장 기름지고 농사에 가장 알맞다. 거기에는 공기, 이슬, 빗물, 하늘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17세기 지질학자 존 이블린은 '흙을 아는 것은 무엇을 심아야 할지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땅에서 자연 그대로 자라난 것을 관찰해 보면, 무엇이 가장 잘 자랄 것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아는 식물은 그것을 길러낸 흙의 성질과 닮은 비슷한 것들을 양분으로 삼고 자란다. 그러므로 땅과 거름의 기본지식을 배우고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위에서 공급되는 유기물질이 아래에서 풍화되는 암석과 섞이면서 흙이 두터워지기 때문에 많은 수확량을 유지하려면 유기질 겉흙을 유지해서 작물에 이상적인 땅을 만들어야 한다. 역사학자들은 중세와 산업혁명 사이에 수확량이 증가한 것은, 18세기부터 19세게 초에 토끼풀과 같은 질소고정식물들이 돌려짓기에 이용된 덕택이라고 보았다. 1970년부터 1850년까지 잉글랜드의 곡물생산과 인구는 곱절로 불어났다. 인구가 늘면서 농업생산물에 대한 수요를 끌어올린 것인가? 아니면 농업 생산물 덕분에 인구가 늘어난 것인가? 인구가 늘면서 유럽의 식단은 뒷걸음질 쳤다. 쓸 수 있는 거의 모든 땅에 경작을 하면서 유럽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채소, 오트밀, 빵을 먹고 연명했다. 남아도는 곡물이 없어 겨우내 가축을 먹이지도 못하고, 나중에는 공유지가 사라져 소를 방목할 수 없게 되자 고기를 먹는 일은 상류계급의 특권이 되었다19세기초에 유럽사람들은 대개 하루에 2천 칼로리 이하를 먹고 살았다. 19세기 지리학자 엘리제 르클뤼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을 때부터 프랑스 혁명까지 프랑스 알프스 경작지 가운데 3분의 1이상이 침식되었다고 추산했다. 그 무렵 일자리를 구하려고 도시로 몰려든 이들은 농사를 짓지도 못하고, 먹을거리를 살 돈도 없었다. 십년을 굶주림에 시달리자 파리의 홈리스는 세곱절로 늘어나면서 혁명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산비탈에 농사짓는 일은 본디부터 단기적인 사업이다. 산에 경작지를 만든 처음 몇해 동안 풍작인 것은 숲에 부식토가 덮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중한 거름은 기름진 만큼이나 움직이는 것이어서 산비탈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가 몇 번만 내려도 흙은 흩어져 버린다. 흙은 곧 황폐해지고, 그 다음은 사라져 버린다. 숲고 흙을 보호하는 정책들은 자주 실패한다. 오래동안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산비탈을 개간해서 작물을 심어 기르는 것이 당장에 훨씬 더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숲은 대개 좋은 흙을 만들어 낸다. 다양한 짐승들이 숲에 살다가 죽어서 땅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숲은 해마다 낙엽을 수북히 떨어뜨리는데, 이 또한 흙을 기름지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짐승의 사체와 식물잔해 덕분에 양분을 되찾은 흙을, 흙속에 기어다니는 지렁이가 먹고 지렁이가 증식하면서 흙은 더욱 비옥해진다.

 

유럽의 농업자립이 마침표를 찍은 것은 수입품목이 설탕, 커피, 차 같은 사치품에서 곡물, 육류, 유제품 같은 기초식료품으로 바뀌었을 때였다. 19세기말 무렵에 유럽나라들은 대개 수입식품으로 국민들을 먹였다. 유럽은 여러해 동안 이어지는 기아 문제를 식량수입과 인구수출로 해결했다. 1820년부터 1930년까지 이주의 큰 물결 속에서 유럽을 떠난 이들이 5천만명을 헤아린다. 오늘날 유럽사람들의 후손은 본국에 사는 이들보다 과거 식민지였던 곳에서 사는 이들이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