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가 늘면서 도시끼리 경쟁관계가 형성되었다. 민병대 조직은 부가 집중되면서 메소포타미아 사회가 무장해야 했던 현실을 드러냈다. 수메르 도시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서 종교지도자가 아닌 군사지도자가 등장하여 스스로를 통치권력으로 자임했다. 새 통치자들이 사원에서 땅을 징발하고, 거대한 토지가 영향력 있는 가문과 세습 통치자들의 손에 집중되면서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메소포타미아 농경지를 발달시킨 관개시설에는 숨겨진 위험이 있었다. 반건조 지역의 지하수에는 대개 소금이 많이 녹아있다. 강 유역과 삼각주에 위치하여 지하수면이 지표 가까이에 있는 곳에서 모세관 작용이 지하수를 흙층으로 끌어올려 증발시키기 때문에 소금기는 땅에 남는다. 반건조 지역의 흙에 소금이 축적되는 걸 막으려면 적당한 수준에서 농경지에 물을 대거나 주기적으로 농경지를 묵혀 두어야 한다.
메서포타미아에서 관개시설 덕택에 높은 생산성이 몇세기 동안 유지되었고, 이 덕분에 인구밀도가 높아지자 더 집중적인 관개시설애 대한 요구가 뜨거워졌다. 마침내 흙에 더 많은 소금이 축적되어 농작물 수확량이 더 이상 늘지 못하고, 늘어가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소금이 땅에 끝없이 축적되면서 경작을 할 수 있는 땅이 해마다 줄고 수확량도 크게 줄었다. 점토판 기록은 소금층이 땅위까지 올라오면서 곳곳에서 땅이 하얗게 변했다고 들려준다. 수메르 문명의 쇠퇴는 농업의 꾸준한 침식을 뒤따라 갔다. 수확량이 줄어들자 병사들 먹이기 힘들어지고, 잉여식량을 분배하던 관료를 유지할 수 없었다. 메소포타미아 농업활동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서 서쪽으로 북부 아프리카와 이집트까지 퍼져나갔다.
문명들이 대개 단 몇 십세대 동안만 번성하는데 비해 나일강 유역은 두드러진 예외다. 나일 삼각주에 맨처음 들어선 농촌은 기원전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강물이 실어온 침적토가 넓은 삼각주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농경과 목축이 점차 사냥과 채집을 대신했다. 처음에 이집트 농부들은 강이 최대로 범람한 뒤 물이 빠지면 단순히 진흙에 씨앗만 뿌리고도 파종한 곡물의 곱절을 거두어 들였다. 강물이 너무 빨리 빠져서 농사가 안되면, 몇 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농부들은 물을 둑에 가두고 기름진 땅에 스며들게 하였다. 인구가 늘면서 운하와 물레방아를 비릇한기술이 발전했고, 그 덕택에 고지대와 강에서 먼곳까지 물을 대어 더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수 있었다.
수메르 농업은 소금축적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이집트 농업은 고대 파라오때 부터 로마제국을 거쳐 이슬람까지 7천년동안 여러 문명의 젖줄이 되었다. 차이가 있다면 생명의 원천인 나일강의 물은 소금기가 거의 없고, 해마다 강가의 농경지에 새로운 침적토를 많이 실어주었다는 것이다. 이집트는 기원점 300년 무렵 단일 국가로 통합되어 메소포타미아와 겨루는 고대 초강대국으로 발전했다. 1880년 무렵 영국의 농업전문가 매켄지 월리스는 "관개농경지들을 흰소금이 땅을 덮어 아무도 밟지 않는 눈밭처럼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고 묘사했다. 인위적 물대기가 가져온 이 참혹한 결과는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역효과는 뒷날 나일강을 댐으로 가로막은 사건이 불러운 재앙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다. 길이 약 480킬로미터, 너비 56키로미터의 나세르댐는 나일강이 한해 범람하는 양의 곱절을 가둘 수 있는 용적이다.
사막의 태양 아래에서는 해마다 호수 수면에서 증발하여 사라지는 물이 깊이로 따지면 1,8마터나 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나일강에서 실어오던 흙 1억 3천만 톤이 나세르호 바닥에 쌓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수천년에 걸쳐 발달해온 나일 삼각주는 오늘날 침적토의 공급이 끊긴 채 쓸려나가고 있다. 나일강 유역의 비옥도가 떨어지자 수확량을 유지하기 위해 화학비료가 이용되었다. 소작농들은 수확량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오늘날 나일강의 농부들은 전세계에서 화학비료를 가장 많이 쓰는 축에 들어간다. 그리고 나세르 댐에서 생산한 전력은 화학비료를 생산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랬듯이 중국 고지대 건조지역의 농부들은 인구가 급증하자 저지대 범람원으로 내려왔다. 흙이라면 다 똑같은 것이라 여긴 수메르사람들과 달리, 요임금은(기원전 2357-2261년)흙의 종류를 조사한 뒤 토질을 아홉가지로 분류하고, 그것을 기초로 세금을 매겼다. 뒷날 기원전 500년에 이르러 흙의 빛깔, 질감, 수분, 비옥도를 바탕으로 이전의 토질 분류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1920년-1921년 지독한 가뭄이 들어 50만명이 사망하자 전세계는 중국 북부에서 일어난 흙의 침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침식이 이어지고 경작지가 사라지자 수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났다. 하지만 이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1920년대의 한 기아 원조연구는 과거 2천년동안 중국 어디에선가는 늘 기근을 겪었다고 보고했다. 흙의 남용이 중국사회에 끼친 영향을 추론하면, 흙의 침식이 문명의 기초를 뒤흔들 수 있다고 생각된다. 강을 메운 흙의 원천을 알아보기로 결심한 로더밀크는 강을 거슬러 중국문명의 요람인 산시성으로 갔다. 중국 북서부에서 그는 협곡들이 깊게 파인 곳을 찾아냈다. 가파르고 쉽게 침식될 수 있는 비탈면에서 숲을 벌목한 뒤 집약적인 농업이 이루어진 그곳에서부터 흙이 하류로 떠내려간 것이었다. 이전에 넓은 숲을 개간한 건 침식과 간접적인 관계가 있을 뿐이었다. 식량생산을 위해 비탈에 경작을 한 것이 침식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사람은 지형을 좌우할 수 없고, 땅에 떨어지는 강우 유형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흙층을 관리할 수 있고, 산악지역에서 흙층의 운명을 분명히 결정할 수 있다. 로다밀크는 산시성의 거주자들이 경작하기 쉬운 강유역에서 숲을 개간했을거라고 추정했다. 인구가 늘어나자 밭은 비탈면을 따라 올라갔다. 산허리를 타고 올라가 새로이 개간된 밭에서 겉흙이 흘려내렸다. 또 버려진 밭에서 풀을 뜯는 염소들과 양들이 비탈에 남아 있던 흙을 벗겨냈다. 흙의 침식으로 농업 생산성이 크게 낮아지자, 사람들은 굶어죽어가거나 이주했다. 경작지는 버려지자마자 풀과 나무들이 땅을 덮는다. 아마 흙이 사라진건 지나치게 이루어진 방목 탓이 아닌가 짐작한다. 불모지가 된건 그 지역주민들의 책임이고, 그 속도가 느려 그들이 알아채리지 못했다.
농산물이 늘면 그만큼 인구도 늘어난다. 풍작이 사람 수를 결정하고, 흉작이 이어지면 반드시 인구가 줄어들었다. 농경시대에서 비교적 최근까지 풍작과 흉작이 거듭되는 동안 사회전체는 늘 굶주림과 마주쳤다. 지난 200만년 가운데 90%가 넘는 기간동안 우리 선조는 작은 무리를 지어 이동하면서 땅에 얹혀살았다. 가끔 어떤 먹을거리가 부족하면 또다른 먹을거리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냥 채집사회는 음식을 모든 이의 것으로 보았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은 언제든 나눠먹는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음식을 저장하거나 쌓아놓지 않았다. 이런 평등주의 행동양식은 먹을거리가 부족한 때가 드물었음을 나타낸다. 음식이 더 필요하면 더 찾으면 되었다. 먹을거리를 구하러 다닐 시간도 많았다. 대부분 사냥 채집사회는 남아도는 시간이 많았다는데에 인류학자들이 의견을 같이한다. 오늘날 우리 현실과는 무척 다르다. 범람원 안에서 농업이 이루어지면서, 초기 농업문명에 한 해의 리듬이 생겼다. 흉작은 많은 이들의 죽음과 거의 모든 이들의 굶주림을 뜻했다. 흙이 침식되면 한때 번성했던 사회도 쇠락한다. 범람원의 생산능력을 넘어서 인구가 증가하면, 농업은 주변의 비탈면으로 확산된다. 이 흙의 침식 사이클을 따라서 한 문명이 나타나고, 다른 문명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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