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년전 무렵, 가장 늦게 찾아온 빙하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빙하는 지구 표면의 3분의 1을 뒤덮었다. 열대지역이 아닌 곳에서는 빙하에 덮이지 않은 지역이라 해도 극심한 환경 변화를 겪었다. 유럽이 빙하에 덮일 때마다 북아프리카는 건조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모래 바다가 되었다. 자연히 사람들이 떠나갔다. 아프리카 남쪽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일부는 아시아를 향해 동쪽으로 가거나 남부 유럽으로 갔다. 주기적인 기후 변동이 나타남에 따라 인류는 전세계로 이동하며,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최근에 나타난 빙하기에 순록, 매머드, 털코뿔소, 큰뿔사슴들이 어마어마하게 떼를 지어 유럽의 얼어붙은 평원을 돌아다녔다. 얼음이 스칸디나비아, 발트해안, 영국북부와 아일랜드 대부분을 뒤덮었다. 나무가 자라지 않는 툰드라가 프랑스에서 독일을 거쳐 풀란드와 러시아까지 펼쳐졌다. 유럽에서 숲은 기꺼해야 지중헤 언저리를 좁게 둘러싸고 있었을 뿐이다. 극심한 환경변화는 한 지역의 거주민들을 고립시켜, 우리가 오늘날 인종이라고 알고 있는 특정적인 외모를 갖도록 분화시켰다. 인류는 백만년 넘도록 옮겨다니면서 산 뒤에야, 비로소 정착하여 농부가 되기 시작했다.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가는 무리가 나날이 커져서 그 지역에서 생기는 것만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지자, 무리의 일부가 나와 새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무리들은 그런 인구 압력을 받으며, 땅에서 더 많은 것을 거두어 들여야 했다. 농업은 늘어나는 인구에 대한 자연스런 행동 반응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맨처음이라고 알려진 준농경민들은 기원전 11000-9000년(1만3천년에서 1만천년 전무렵)무렵에 이라크와 이란 사이에 있는 자그로스 산맥 기슭에 살았다. 가젤영양, 양, 염소를 사냥하고 야생곡물과 콩을 체집하면서 작은 마을을 이루어 살았지만, 철 따라 사냥 캠프와 동굴도 자주 이용했다. 기원전 7500년무렵 사냥과 채집을 대신하여 목축과 경작이 주요 식량공급원이 었고, 정착촌들은 양과 염소를 치고, 밀 보리 콩 따위를 길렀다. 그 무렵 식량 가운데 사냥이 차지하는 비중이 5% 밖에 안되었다. 기원전 만년에서 9천년까지 천년 동안 세계의 기후는 거의 완전 빙하기로 되돌아 갔다. 어린 드리아스기라고 일컫는 시기인데 나무 꽃가루는 4분의 1도 못미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아부후레이라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굽어보는 낮은 고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부후레이라 정착사회와 관련된 최초의 식물유물에는 유프라테스강가의 습지와 숲에서 자라난 백가지가 넘는 종자와 씨앗과 과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짐승 뼈도 많이 나와 사냥에 크게 기대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200명이 살던 아부후레이라는 어린 드리아스기가 시작되어, 천년 동안 춥고 건조한 날씨로 변하면서 식물과 동물자원이 급격하게 변했다. 가뭄을 견디지 못한 식물의 열매와 씨앗이식단에서 사라졌다. 아부후레이라의 초기 주민들은 기후가 바뀌면서 먹을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 민감했다. 야생 식량자원이 완전히 바닥난 뒤로 기후가 점점 건조해짐에 따라,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식량부족을 겪었다. 아부후레이라의 굶주린 이들은 점점 건조해진 세상에 적응하려했던 자신들의 노력이 세상을 바꾸어 놓으리라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 어린 드리아스기가 끝날 무럽 서아시아의 여러지역에서 경작과 정착양식의 변화가 나타났다. 양쯔강 유역에서도 어린 드리아스기 무렵 야생쌀이 재배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때 갑작스런 기후변화 탓에 자원기반의 쇠퇴를 겪게된 준정착민들이 어쩔수 없이 농경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기원전 6500년 무렵에는 주민수가 수천명에 이르는 부락도 많아졌다. 해마다 자원을 따라 주기적으로 이동하는 생활방식이 서아시아에서 끝을 맺었다. 환경에서 먹을거리를 더 많이 구할 수 있는 이들은 가뭄이나 혹한 같은 어려운 시기에도 더 잘 살아남았다. 역경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역경의 시대가 되면 밭을 가꾸는 무리들이 유리했다. 농부들은 한 곳에 정착한 뒤로 더 좁은 땅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부양하는 법을 배웠고, 그 덕택에 언제나 더 많은 사람수를 유지하여, 영역을 둘러싼 경쟁에서 약탈자를 몰아낼 수 있었다.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서 농부들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무너뜨릴수 없을 만큼 막강해졌다. 농사에 이용되는 대부분의 가축이 사육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만년에서 6천년의 일이다. 개는 그보다 빨리 2만년이나 빨리 인간사회로 들어왔다. 양은 기원전 8000년 무렵에, 소는 기원전 6000년 무렵에 그리스 또는 발칸반도에서 가장 먼저 사육되었다. 동물 노동력을 이용하면서부터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고, 사람수가 급격하게 늘었다. 작물경작과 축산업이 함께 성장하면서 서로 더욱 발전시켰고, 더 많은 먹을거리가 생산되었다. 양과 소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식물들을 젖과 고기로 바꾼다. 사육되는 가축들은 노동력을 보태 수확량을 증가시켰을 뿐 아니라, 작물이 양분을 소비한 흙에 똥거름으로 양분을 보탰다.
유럽빙하가 녹았을 때 지구의 인구는 400만 명쯤 되었다. 다음 5천년 동안 세계인구는 100만명이 더 늘었다. 농경 사회가 발달한 뒤로 인구는 천년마다 곱절 불어나서 기원전에서 기원후로 넘어올 즈음에는 2억명에 이르렀다. 2천년 뒤에는 몇 백만 제곱킬로미터의 경작지가 거의 65억명을 먹여살리게 되었다. 최초의 사회가 농경생활에 익숙해진 뒤 오래지않아서 겉흙이 침식되고, 토질이 나빠지면서 작물 수확량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날이 생산력이 떨어지는 저지대에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 절박함 덕분에 농법에 중요한 혁명이 일어났다. 관개농업이 시작된 것이다. 기원전 4500년 무렵 메소포타미아의 기름지고 좋은 땅은 대부분 경작되고 있었다. 농토가 강가에 가까워진 뒤로는 더 넓혀갈 땅이 남지 않았다. 새 땅이 모자라자 작물 생산량을 늘려 증가하는 인구를 먹여 살리는 일에 노력이 집중되었다. 범람원 전체가 경작지로 변했을 즈음, 페르시아만 부근의 수메르 평원에 쟁기가 등장했다. 쟁기 덕택에 경작되고 있는 같은 땅에서 식량생산이 증가했다.
사냥 채집사회는 일반적으로 자원을 모두가 함께 소유하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지만 새로운 농경시대는 땅과 식량의 불평등한 소유를 용납했다. 농부가 아닌 이가 최초로 등장한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모두가 들에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이르자, 계급분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식량과 자원의 분배를 담당하는 종교. 정치계급이 등장하면서 행정제도가 발달했다. 사회계급의 등장에 뒤이어 전문화가 이루어지면서 국가와 정부가 발달했다. 잉여식량이 생기자 사회는 성직자, 군인, 행정가, 더 나아가서는 화가, 음악가, 학자까지 먹여 살릴수 있었다. 오늘 날에도 농부가 아닌 이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잉여식량의 양은 사회의 다른 영역이 발전할 수 있는 수준을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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