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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로고테라피2

로고테라피는 가르침도 아니고, 설교도 아니다. 도덕적 훈계와 거리가 먼 것 처럼 논리적 추론과도 거리가 멀다. 비유를 하자면 로고테라피 치료사가 하는 일은, 화가보다는 안과의사가 하는 일에 가깝다. 화가는 자기 눈에 비친 세상 모습을 전하려고 애쓴다. 반면에 안과의사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수 있도록 해주려고 노력한다. 로고테라피 치료사의 역할은 환자의 시야를 넓히고 확장하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잠재되어 있는 의미의 전체적인 스펙트럼을 환자가 인식하고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심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 가장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 할 수 없다. 사랑으로 인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과 개성을 불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것을 볼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사랑의 힘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런 잠재능력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는데 있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견디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그 시련이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련의 원인, 그것이 심리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의미있는 행동이다. 사람은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나 혹은 자기 인생을 즐길수 있는 기회를 박탈 당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시련의 '불가피성'이다. 이런 시련의 도전을 용감하게 받아들이면,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 의미를 갖게되며 그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할수 없는 시련의 잠재적인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아마비 혈청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에 사용되는 시험용 원숭이는, 이 때문에 끊임없이 주사바늘에 찔리고 또 찔려야 하는 고통을 겪는데, 그 원숭이가 과연 자기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알까? 모두 아니라고 말한다. 원숭이의 지능으로 볼 때 원숭이는 인간의 세계, 즉 고통으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여러분은 인간이 삼라만상의 진화과정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 세계를 초월한 또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셨나요? 인간에 겪는 시련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또 다른 차원의 세계 말입니다. 사람은 현재의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끊임없이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한다. 어떤 선택이 단 한번의 실현을 시간의 모래 위에 불멸의 발자국을 많들 것인가? 과거는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졌으며, 그 어느 것도 사라질 수 없다. 과거에 그랬었다는 것처럼 확실한 존재방식도 없다.

 

염세주의자는 매일 같이 벽에 걸린 달력을 찢으면서, 날이 갈수록 그것이 얇아지는 것을 두려움과 슬픔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비슷하다. 반면에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떼어낸 달력의 뒷장에다 중요한 일과를 적어놓은 다음 그것을 순서대로 깔끔하게 차곡차곡 쌓아놓은 사람 같다. 그는 거기에 적혀있는 풍부한 내용들, 그동안 충실하게 살아온 삶의 기록들을 자부심을 가지고 반추해 볼 수 있다. 무엇 때문에 늙은이가 젊은이를 부러워할까? 잠재가능성...., 미래 때문에.... 가능성 대신에 나는 내 과거 속에 어떤 실체 갖고 있어 내가 했던 일, 내가 했던 사랑 뿐만 아니라, 내가 용감하게 견뎌냈던 시련이라는 실체까지. 이 고통들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들이다. 비록 남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마음 속의 두려움이 정말로 두려워 하는 일을 만들고, 지나친 주의집중이 오히려 원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환자가 치료된 것은 두려움이 있던 자리에, 대신 그 반대되는 소망이 들어간 것이다.

 

신경질환은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막연한 불안과 같은 피드백 기제가, 그 근본적인 발병 원인인 것 같다. 어떤 증세가 공포를 낳고, 그 공포가 다시 증세를 유발하고 , 이번에는 반대로 그 증세가 공포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악순환의 고리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생각들과 끊임없이 싸우는 강박증 환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하지만 그렇게 싸우는 것이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강박증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기연민이든, 멸시든 간에 환자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치료의 핵심은 환자가 자기자신을 초월하는데 있다.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가르침, 즉 인간은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의 결과물이거나 유전과 환경의 산물에 불과하는 이론은 태생적으로 위험을 안고 있다. 인간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환자로 하여금 자기가 믿고자 하는 것, 즉 자기가 외적인영향과 내적인 환경의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믿게 만든다.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이 믿을수 없을 정도로 용감하게 저항하고 맞서 싸울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직접 목격한다. 인간은 조건 지어지고 결정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 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같은 맥락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어느 순간에도 변할수 있는 지유를 가지고 있다. 어떤 예측이든 거기에는 그 사람이 처한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이 반영되어 있다. 타고난 자질과 환경이라는 제한된 조건안에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될것인가'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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