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로고테라피1

 

로고테라피는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가는 인간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보고 있다. 인간이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그 사람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며, 이 의미는 유일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반드시 그 사람이 실현시켜야 하고, 또 그 사람만이 실현시킬 수 있다.

 

설문조사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16% 학생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표라고 대답한 반면, 78% 학생들은 자기 삶의 목표와 의미를 찾는 것이라 했다.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의지도 좌절을 당할 수 있다. 이것을 '로고테라피'에서는 실존적 좌절이라고 한다. 실존적이라는 단어는 세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다. 1) 존재 그 자체, 즉 인간 특유의 존재방식, 2) 존재의 의미 그리고, 3) 각 개인의 삶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 즉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말한다.

 

갈등을 겪는다고 해서 다 신경질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갈등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고통도 역시 다 병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다. 특히 그 고통이 실존적 좌절 때문에 생긴 경우에는, 그것을 신경질환 증세라기보다 인간적인 성취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거나, 아니면 그런 것이 과연 있을까 하고 의심하거나 간에, 이런 현상이 병 때문에 생긴다거나, 혹은 이것 때문에 결국 병이 생길거라고 하는 생각을 나는 단호하게 부정한다. 실존적 좌절 그 자체는 병적인 것도 병원적인 것도 아니다 . 가치있는 삶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것에 대한 절망도 실존적 고민이지 정신질환은 아니다. 의사는 환자의 실존적 절망감을 한 움큼의 신경제로 해결하려 한다.  의사는 환자의 실존적 위기를 통해 그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환자는 자기 존재 깊숙한 곳에서 정말로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기보다는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면의 긴장은 정신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할 때 인간은 동물적 본능의 일면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그럼으로써 자기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그런 동물적 본능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낙원에서나 얻을 수 있는 그런 안전함은 이제 영원히 인간에게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인간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근래에 들어 인간은 자기 행동을 지탱해주던 전통이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 주는 본능도 없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주는 전통도 없다. 어떤 때는 그 자신조차도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거나,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실존적 공허는 대개 권태를 느끼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 인간은 고민과 권태의 양극단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  실제로 요즘은 고민보다는 권태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이 문제 때문에 정신과의사를 찾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앞으로 점점 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동화 과정으로 일하는 사람이 여가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애석한 것은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 얻게된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른다는데 문제가 있다. 일요병이 그 예이다, 일요병은 코 뜰새 없이 바빴던 한 주일을 보내고 내면의 공허감이 몰려올때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된 사람이 겪는 일종의 우울증이다.

 

삶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포괄적인 삶의 의미가 아니라, 어떤 주어진 상황속에서 한 개인의 삶이 갖고 있는 고유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각 개인에게 부과된 임무는 거기에 부가되어 찾아오는 특정한 기회 만큼 유일한 것이다.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은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어서는 안된다. 그 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짐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답할수 있다.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해 무엇에 대해, 혹은 누구에게 책임을 져야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스스로의 판단에 밑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극속의 낙관  (0) 2011.07.20
로고테라피2  (0) 2011.07.19
억압에서 갑자기 풀렸을 때  (0) 2011.07.15
나를 강하게 만드는 것들  (0) 2011.07.14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  (0) 2011.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