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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제레미 리프킨 지음,이창희

엔트로피 위기

엔트로피 법칙은 물질적 진보라는 우리의 생각을 깨뜨려 버렸다. 앤트로피 법칙은 경제의 기본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이것은 또한 시간과 문화의 개념을 바꾸어 놓으면서 기술의 신화를 깨뜨려 버린다.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를 거부하며 무너져가는 과거에 매달려 몸부림 칠 것이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새로운 철학적 틀로 인해, 이들은 여기서 빠져나가게 해줄 어떤 수단을 찾아 헤맬 것이다. 탈출구는 항상 있고, 어떤 힘도 인간이 자연을 조작하는 능력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한계란 없으며, 겁먹고 어리석은자들만이 한계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배워왔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중력을 믿지 않는 사람과도 비슷하다.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니면, 중력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사람은 마천루 꼭대기에서 뛰어내린다. 중력은 이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따라서 이 사람을 무자비하게 땅바닥에 떨어뜨려 정신이 번쩍나게 한다.

 

기존의 세계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대략 세가지 유형을 보인다. 첫째 낙관주의자들이다. 몇 발자국 더 가서 모퉁이를 돌면 갑자기 기술적인 해결책이  나타나, 우리 생활방식을 계속 유지시켜줄 것이라는 희망에 매달리는 사람들이다. 낙관주의자들의 패러다임은 유전공학시대, 이 새로운 세계관의 초석이 될 것을 희망하고 있다. 태양 에너지의 흐름은 사실상 무한하지만, 지각을 구성하는 물질은 그렇지 못하다. 지구상의 물질은 끊임없이 열악해 지고 분산되어 간다. 자연적으로 재생된다고 해도 소비된 물질의 일부만 재생되어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완전히 손실되어 회수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스템 전체를 통해 물질과 에너지 흐름을 높이면 높일수록,  태양이 언제까지 지구를 비추느냐에 관계없이 재생 가능한 자원은 고갈되어버릴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은 실용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실용주의자들은 기존의 구조를 약간 수정하여 엔트로피적 세계관의 의미를 일부나마 반영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실용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세계관의 시야가 한정되어 있다. 기존의 고에너지 구조를 약간 수정하는 것이 이들의 필생의 과업이다. 대체연료나 전기로 가는 자동차 정도를 생각할 것이다 . 자동차를 보면 실용주의자들은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이다.

 

어떻게하면 제2법칙을 이용해 엔진을 설계해서 더 많은 일을 하게 할 것인가?  열역학적으로 가장 좋은 차체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엔트로피적 세계관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의문을 가질 것이다. 자동차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정말로 필요한가?자동차는 우리의 복지 건강, 문화를 증진시켜 주는가? 세계가 엔트로피 극대점에 달해서 일을 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면, 시간도 정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적 의미에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회의 에너지 흐름을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에너지 흐름과 비슷한 수준으로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그 경제는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져든다. 

 

세 번째 유형은 향락주의자라 불러야 할 것이다. 신나게 놀아보자. 이들은 전체적으로 나빠진다는 사실에 동의하며, 대기오염, 식품오염, 자연의 파괴 등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제국 말기처럼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욕심많고 파괴적이라 할 것이다. 낙관주의자, 실용주의자, 향락주의자의 공통점은 오늘날의 상황이 나쁘기는 하지만, 우리 세대는 앞선 어떤 세대보다 현실을 잘 이해하고 이를 장악하고 있다고 믿는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괴리되고, 도시화된 우리의 지성은 환경과 인간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통찰할 능력이 없다. 농부이자 작가인 웬델베리는 현대사회의 딜레마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현대인은 인류 역사상 가장 불행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돈을 버는 것 외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리고 그가 번 돈은 흘러가버린다. 그는 이것을 내가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느낄만한 물건을 만져보지 못한다. 여가와 오락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기분이 나쁘고, 안색도 좋지 않으며 , 자니치게 뚱뚱하고 건강도 나쁘다. 그가 마시는 공기, 물, 먹는 음식에는 모두 독이 들어 있다. 좋은 약에도 불구하고 애정생활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아이들의 말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는 아무데도 관심이 없고, 자기가 왜그런지도 모른다. 그는 아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조차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빼앗길까 두려워 한다. 그는 실직을 하거나, 경제가 나빠지거나, 전력회사가 문제가 생기거나, 운수회사가 파업을 하거나, 가족이 몹쓸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걱정 때문에 또 전문가를 찾는다."  베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자신의 의지와 기술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어리석은 농부나 미개인들도 전문가 사회의 가장 총명한 근로자나 기술자 또는 지성인보다 유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