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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제레미 리프킨 지음,이창희

기계론적 세계관

기계론적 세계관은 프랜시스 베이컨, 르네 데카르트, 아이작 뉴턴 등이 대표적이다. 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는 이들이 만든 사상의 영향 아래 살아가고 있다. 베이컨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호머 등의 저술들을 탁상곤론자들의 학문으로 깍아내렸다. 주장하는 바는 거창하지만, 인간의 조건을 개선하거나 향상시키기 위한 실험은 단 한번도 해 본적 없다. 베이컨은 가만히 앉아서 자연을 관조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을 통제할 방법을 찾고 싶어했다. 베이컨은 현대 실용주의 원조라 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기, 증명하기, 사실만 이야기하기... 베이컨이 새로운 세계관의 문을 열자 들어온 사람은 수학자인 데카르트다. 그 다음 뉴턴이 합류했다. 그는 상점을 열고 사업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모든 도구를 가져왔다. 데카르트는 기계 패러다임의 금과옥조가 된 다음 이야기로 결론을 맺고 있다.  “나는 수학이 인간에게 주어진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지식 확득의 수단이라 확신한다. 수학은 모든 것의 원천이다." 데카르트는 자연을 단순히 움직이는 물체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그는 모든 질적인 것을 양적인 것으로 대처했고, 중요한 것은 '오직 공간과 위치다' 라고 주장했다.

 

자연을 수학법칙에 적용시키면서 뉴턴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자연현상은 어떤 힘에 의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힘에 의해, 어떤 물체의 입자들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유에 의해, 자꾸 끌려 일정한 형태로 모이기도 하고, 서로 밀쳐 멀리 떨어지기도 한다. 뉴턴은 3대 법칙을 이렇게 가르친다.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지하고 있는 물체는 정지하고 있으려고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등속직선운동을 하려고 한다. 물체의 가속도는 그 물체에 가해진 힘에 비례하고, 그 방향은 가해진 힘이 가르키는 직선 방향이다. 모든 힘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힘이 작용한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운동하는 물체만 다루었다. 왜냐하면 운동하는 물체만이 수학적으로 측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계관은 기계를 위한 것이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 기계론적 패러다임은 천하무적이었다. 그것은 단순하고 예측 가능하며, 무엇보다 실효성이 있었다. 이제 우주는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기다리던 대답이 나왔던 것이다. 사물에는 질서가 있고, 그 질서는 수학공식이나 과학적 관찰에 의해 밝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 학자들에게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있었다. 왜 사회 안에서 사람들의 정상적인 활동이 뒤엉키고 혼돈스러운 것처럼 보이는가? 사회가 잘못되어 있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우주를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을 사회가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필요한 것은 자연의 법칙이 어떻게 인간과 사회조직에 작용되는가를 알아내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가 하는 것이다. 우주의 법칙과 사회의 기능 원리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정부와 사회역할을 기계패러다임 안으로 끌어들인 존 로크와 경제를 기계론 안으로 끌어들인 애덤스미스 였다.

 

로크에게는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왜 인간의 활동은 이처럼 혼돈스러운가? 그는 사회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세계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신 중심주의에서 비롯된 비이성적 전통과 관습에 따라 사회적 질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베이컨, 데커르트, 뉴턴이 자연에 대해 한 일을 로크는 인간남녀에 대해 한 것이다. 즉 인간은 싸늘하고 기계적인 우주안에서 다른 물질들과 상호적용하는 물리적 현상으로 전락하고만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질서가 뿌리내려야 할 기반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로크에 따르면 순수한 자기 이익의 추구가 사회구성의 유일한 기반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사회는 유물론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흐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성에 따라 이것이 자연의 질서라고 결론 지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로크의 주장이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각 개인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역할을 수행하고 경력을 쌓아나가고,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서는 어떠한 가치판단도 필요없다자기 이익이야말로 사회의 유일한 기반이기 때문이다.

 

로크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을 향한 길이다. 인간은 자연의 멍에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계속 무절제하게 부를 추구하게 되고, 이 때문에 각 개인간 싸움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 일부가 희생되지 않을까? 라는 물음에 로크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천성이 착하기 때문이고, 또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것은 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상 획득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가 가진 부의 총량을 계속 늘려가기만 하,면 사회의 조화는 끊임없이 개선될 것이다. 자연은 모든 것이 아직 충분하고, 못가진 자들도 쓰고 남을 만큼 풍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싸울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각 개인이 축적할 수 있는 부의 양은 무한한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토마스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어느 정도 이상의 부가 행복의 걸림돌이 된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로크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로크는 "부의 소유는 단순히 사회적 권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부를 창출할 의무가 있다. 자연은 인간의 노동과 합쳐져 생산성을 가져야만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노동으로 땅을 경작하는 사람은 인간 공통의 부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늘이는 것이다. 경작되는 1에이커의 땅에서 나오는 생산물은 똑같은 지력을 지닌 그러나 자연상태로 버려진 1에이커의 땅에서 나오는 산출물보다 열배 정도 많고 , 따라서 인간의 삶을 더욱 잘 지탱해 줄 수 있다.

 

로크는 또 이렇게 주장한다. “개인은 자기가 원하는 만큼 많은 내구제(금,은 등)를 축적해야한다.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재산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활용되지 못하고 사장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생산지향적이고 유물론적이었기에 로크는 미국 인디언들을 가차없이 매도한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에 살면서도 게을러서 그것을 활용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광활한 영토에 사는 왕의 먹고, 입고 사는 모습은 영국의 노동자만 못하다." 로크로 인해 현대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계몽시대 이래 개인 생존의 의미와 목표는 오직 생산과 소비로 전락해 버렸다. 인간의 필요와 열망, 꿈과 소망은 모두 물질적 이익의 추구라는 울타리 안에 걷혀버린 것이다.

 

국부론에서 애담 스미스는 움직이는 천체가 자연의 일정한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우리 경제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법칙을 따르면 경제는 성장한다. 그러나 정부의 규제와 통제 때문에 경제는 부자연스러운 방향으로 끌려가고 따라서 자연의 법칙이 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장은 더욱 빨리 팽창할 수 있는데도 그러지 못하고 생산은 억제 당하는 것이다. 경제학법칙을 들여다 보면, 가장 효율적인 경제운영 방법은 '자유방임'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스미스의 주장이다. 자유방임이란 아무 간섭도 받지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사람들을 내버려두는 것이다. 존 로크와 마찬가지로 애덤 스미스도 모든 인간활동의 기본은 물질적 자기

이익의 추구라고 믿었다.

 

각 개인은 그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게 활용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개인의 이익이지 사회의 이익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이익추구 행위는 자연적으로 사회에 이익이 된다. 애덤스미스는 존 로크가 사회적 관계에서 도덕성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경제에서 도덕성을 제거해버렸다. 스미스의 주장에 따르면 '보이지 읺는 손'은 모든 경제활동을 지배하는 법칙으로 자본투자, 고용, 자원의 활용, 상품의 생산 등을 자동적으로 배분해 주는 힘이다. 이성을 통해 인간은 이 법칙을 이해할 수 있다고 스미스는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중력을 통제할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힘으로 보이지 않는 손을 개선할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라는 확신에 입각해서 애덤스미스는 인간의 모든 욕구를 자신의 물리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물리적 추구에 종속시켰다. 윤리적 선택을 할 필요가 없고,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의 실용주의적 판단이 있을 뿐이다.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 존 로크, 스미스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널리 퍼뜨린 사람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주에는 정확한 수학적 질서가 있고, 이 질서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도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자구상의 대부분의 것들은 원시상태에 있고, 따라서 혼란과 혼돈 속에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재배열하여 우주의 질서와 같은 질서를 어떻게 창출해내느냐하는 것이다. 그 답은 역학의 과학법칙을 이용하여 인간의 물질적 자기 이익이 증대되는데, 가장 적합하도록 재배열하는 것이다. 이 위대한 패러다임의 논리적 귀결은 간단하다. 더 많은 물질적 부가 축적될수록 세계는 더욱 질서 있게 된다. 과학과 기술은 이를 실천하는 도구다. 어떤 사업가, 정치가, 과학자가 주요 현안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연설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오래 전에 사라진 철학자들의 영혼이 나타나서 연설문을 대신 써준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사롭잡히게 된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이론은 뉴턴의 과학적 발견 만큼이나 모든 면에서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사회학적 다윈주의자들은자연도태의 개념을 적자생존의 개념으로 변형했다. 적자생존은 다음과 같이 해석되었다.

 

"자연상태에서 각 개체는 다른 모든 생물체와 무자비한 전쟁 상태에 있다. 끝까지 살아남아서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개체들은 스스로의 물질적 이익을 가장 잘 지킨 개체들이다. 그러니까 각 세대는 앞선 세대보다 자기 이익을 극대화할 능력과 물질적 풍요를 충족시킬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 따라서 다윈의 이론은 기계적 세계관의 주요 가설을 완벽하게 반복하고 있다. 진보란 자연에 존재했던 최초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자연으로부터 창출하는 것을 말한다. 기계론적 세계관, 수학, 과학, 기술의 세계관, 유물론과 진보의 세계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관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세계관들은 이제 생명력을 잃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 세계관들이 뿌리 내리고 있는 에너지 환경이 빈사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미래 세대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살 것이고, 이제 우리는 그 패러다임을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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