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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제레미 리프킨 지음,이창희

세계관-2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그리스사람들은 역사를 지속적인 쇠락의 과정으로 보았다. 우리같은 사람들은 인간의 역사가  초기 원시인들의 힘겨운 노동에서 오늘날의 쾌적하고 여유있는 생활로 점차 발전해 왔다고 믿는다. 우리 현대인들은 일주일에 40시간 일하고, 1년에 2-3주 정도 까지는 휴가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러나 대부분의 수렵채취인들에게 있어 이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아직까지 존재하는 수렵채취인들을 보면 일주일에 12-20시간 밖에 일하지 않고 몇 주 몇 달에 걸쳐 전혀 일하지 않는다. 대신 놀이를 하거나 스포츠, 예술, 음악, 춤, 제례의식, 상호방문들로 여가시간을 즐긴다. 그리고 그들은 대체로 건강하다.

 

헤시오도스에 의하면 “판도라가 인생의 온갖 악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연 순간 황금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그때부터 각 시대는 앞선 시대보다 살기 힘들어 졌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마지막 시대는 철의 시대다. 헤시오도스는 기원전 8세기를 다음과 같이묘사하고 있다. "이제 철의 시대로 들어섰다.  낮에는 노동과 괴로움에서 잠시도 벗어날 길이 없고, 밤에는 약탈지 때문에 전전긍긍해야 한다.

아버지의 마음은 아이들과 한마음이 아니며, 아이들도 아버지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주인과 손님의 생각이 다르며, 친구 사이에도 생각이 다르다. 부모는 금방 늙고 권위를 잃는다. 올바른 사람, 착한사람, 신의를 지키는 사람은 아무런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과 오만한 사람이 명예를 갖는다. 정의는 폭력에서 나오고 진실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역사는 완벽을 향한 발전이 아니라 질서에서 혼돈으로 움직여 가는 사이클의 영원한 반복일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좋은 사회질서는 변화가 가장 적은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의 세계관에서 지속적인 변화와 성장이라는 개념은 설자리가 없었다. 여기서 성장은 결국 사람을 더 가치와 질서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 최초의 완벽한 상태를 조금씩 갉아먹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최초의 유한한 풍요를 조금씩 소진하는 것을 뜻한다면 이상적인 상태는 이러한 쇠락의 과정을 최대한 늦추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더욱 큰 변화와 발전을 더욱 심한 쇠락과  혼돈으로 해석해왔다. 따라서 그들의 목표는 변화로 부터 최대한 보호된 세계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가서 중세의 농노를 만났다고 상상해 보자. 초면의 현대인과 농노는 날씨 애기가 끝나고 나면 할 얘기가 별로 없을 것이다. 우선 현대인은 농노의 삶의 목표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당신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어떻게 삶을 개선하려는가? 자식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행복과 바람직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 중세에 기독교적 세계관은 통일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역사관을 낳았다. 인간의 목표는 뭔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는 것이었다. 사회는 이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거대한 유기체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사회는 신이 이끄는 일종의 도덕적 생물체이고, 그 안에서 각 개인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소르본느대학의 자크 튀르고 교수가 이야기 하는 “역사는 일직선으로 진행하는 것이며 각 단계는 앞선 단계보다 진보한 모습을 보여준다.  역사는 축적의 산물임과 동시에 진보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방식의 근원인 대부분의 사상이 조그만 실오라기다이것들이 합쳐지고 짜여져 역사의 패러다임을 만들었고, 이 패러다임 위에서  전환의 시기에 형성 되었던 것이다. 

 

현대는 기계의 시대다. 정밀, 신속, 정확이 가장 중요한 가치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묻는다. 그거 얼마나 빨라?, 가는데 얼마나 걸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레버, 바퀴 등 기계부품으로 가득차 있다. 우리의 여가시간은 새로운 기계와 친해지는데 쓰고 있다. 근무시간을, 모니터를, 조절하고 계기를 점검한다. 우리는 하루의 일상을 기계에 맞춰 조절하고, 기계로 의사소통을 한다그리고 계산기, 컴퓨터, TV 같은 기계를 사용하며 배운다. 여행도 자동차와 비행기같은 기계로 한다.  심지어 보는 것도 전등이라는 기계에 의존한다. 기계는 우리의 생활방식이며, 우리의 세계관은 기계에 집중되어 있다. 현대인에게 있어 역사는 기술발달의 과정이다. 지구는 거대한 부품상점이다. 이 부품들은 조립되어 어떤 기능을 가진 시스템으로 태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일은 끝이 없다. 새로운 설계가 쉴새없이 나오고 뭔가 새로운 기능을 수행할 기계가  끊임없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새롭게 조립하고 공정을 확장한다. 우리는 기계가 설정한 틀에 따라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기계가 우리 삶의 외부적 측면에 대해 갖는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우리 존재의 내부까지 뚫고 들어온 모습을 직시하는데는 소극적이다. 기계는 너무 우리 내부로 깊숙이 들어와버렸기 때문에 기계가 어디서 끝나고, 우리는 어디서 시작되는지 알기 어렵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언어는 이미 우리의 언어가 아니라 기계언어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과의 동기화, 관계측정, 스스로 시동을 건다. 마찰을 피하고, 사람이 잘돌아가거나 고장나거나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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