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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심(롤프 하우블 지음,이미옥 옮김)

정당한 시기심

혁명가나 개혁가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소외된 자들의 시기심을 이용한다는 신랄한 비난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오스트리아 노벨상 수상자인 아우구스트 폰 하이예크는 사회적 평등을 내거는 투쟁은-그는 이 투쟁을 재산의 공평한 분배로 서술한다. -시기하는 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훔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정치적 요구들은 이런 더러운 감정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자기보다 더 잘 사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초적인 욕구 조차 충족하지 못하는데, 몇몇 사람이 엄청난 부를 독차지하고 있다며, 물의를 일으켜 부에 대해 적대감을 조성하려한다. 이런 무리들은 정의라는 이름을 부르짖지만 사실 정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더 많이 버는 사람이 그에 걸맞는 부를 향유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부자들을 단지 수치스러운 존재로 본다. 시기심이 늘 갈망하는 재산의 부당한 분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시기심은 시기하는 사람들이 비판하는 현재의 재산분배가 사실은 공정한 분배라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도 아니다. 시기할 수 있다는 것은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사람들 사이의 불공평에 의문을 갖게 한다. 시기심은 시기하는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자극하여 시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 시기를 받는 사람은 불평이 오히려 부당한 주장이라고 나름대로의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이렇듯 시기심은 온갖 교육적인 시도( 의도는 좋으나 비현실적인)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어디에서나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처럼 시기심과 정의의 관계는 간단하게 파악할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만일 누군가가 갈망하는 재산을 다른 사람이 더 많이 가진 원인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면, 그는 기존의 불평등이 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부당함은 객관적인 사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갈망하는 재산의 분배가 공정한지 부당한지를 확정짓는 것이 사람들이다. 이들이 내리는 판단은 논쟁의 여지가 많다. 시기하는 사람과 시기의 대상은 각자 자신들이 속한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게 된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먼저 규범에 따라 정의된다. 즉 규범은 그들이 공동생활을 위해 만든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방향을 제시할 수 있도록 이를 지키고 보존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공정한 재산 분배인지에 대해 실험하였다.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다. 충분한 직업교육을 받은 신입사원은 비교적 교육을 덜 받은 신입사원에 비해 더 많이 받아야 공정하다고 보았다. 더 많은 성과를 내는 사람은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신입사원이 독신인지 아니면, 부양가족이 있는지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가족을 부양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 더 많이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이야기한다. 한 사람의 만족도는 누구와 비교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자기보다 월급을 덜 받는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므로 애초부터 낮은 수입을 기대하고, 그래서 요구하는 수입도 낮은 편이다. 여자들은 요구 수준을 낮춤으로써 불평등 대우에 스스로 합의하는 셈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득이 됨에도 분배가 확연하게 불평등한 경우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 분배를 부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의는 우리에게 중요하다. 만일 부당하게 대우 받고 있다고 느끼면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우리는 공정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고 싶은 욕구가 있는 듯하다. 모두가 자신들에게 제공되는 것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랄까? 이런 믿음은 우리의 보편적인 만족감을 향상시켜 주며, 노력하면 뭔가 이룰 수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더 많이 도와 주도록 한다. 착한 일에 대한 보상을 믿어도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부당함도 예상해야한다. 공정한 세상에 살고 있는 믿음은 긍정적인 환상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당한 또는 우리 자신이 체험한 온갖 부당함은 긍정적인 환상을 가질 수 없도록 위협한다. 우리는 부당함을 고쳐달라고 요구하고, 때로 우리 스스로 그것을 교정하는 데 앞장 설 준비도 되어 있다. 물론 결과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무기력하다고 느낀다. 부당하다고 할 때 우리 스스로 그 부당성이 잘못 되었음을 입증할 근거를 찾게 된다. 아무런 흠도 없는 사람들이 언제라도 부당함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다. 우리 역시 언제라도 희생물이 될수 있다는 뜻이니까. 우리는 차별대우를 받는 사회적 집단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다른 집단의 구성원들에 비해 덜하다고 간주한다. 어쨋거나 우리가 극복할 수 없을 만큼의 부당함은 없고, 만일 통제할 수 없는 불운이 덮쳤다면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우리의 삶이 정당하다는 믿음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운명에게 책임을 돌리는 편이 나은 까닭이다.

 

공정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며 권위적이다. 이들은 자신의 특권을 보호하고 자신과 자신 보다 못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하찮은 일로 여긴다. 외에도 이들은 소외된 자들을 경시하고, 소외된 것이 그들의 책임이라고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이들은 책임을 느끼지 않으며 소외된 자들을 도와줄 생각도 없다. 이들을 지배하는 느낌은 긍정적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소외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시기심을 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은 죄책감을 느낀다.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특권층들은 기존의 재산분배를 문제로 삼는 모든 시도를 즉각 시기하는 것으로 보고, 수치심과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비난을 퍼부음으로써 대응한다.  이것이 성공하면 기존의 불평등은 안정적인 궤도를 달리게 된다. 

 

실제로 국민들 사이의 소득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국민들 가운데 고소득층에 속하는 3분의 1이 저소득층 3분의 1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이 지불하는 세금, 즉 소득세가 하찮은 액수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국가는 소득세의 주원천을 비교적 돈을 적게 버는 사람들이 내는 근로 소득세로 충당하고 있다. 부자들이 세무소에 터무니 없이 적게 신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에서 부자되는 방법중 하나가 탈세를 꼽고 있으며 그외 상속, 그리고 15%만이 노동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합법적인 방법과 제 힘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소수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로써 우울한- 무기력하게하는 시기심이 등장 할 위험이 있는데, 이런 시기심은 참기 힘들어서 적대적인 -피해를 주는 시기심으로 바뀔 경향이 다분하다. 사회의 평화가 위태로워질 가능성도 과소평가해서 안된다. 시기하는 사람에게 그가 갈망하는 재산을 다른 사람보다 적게 소유한 것이 어느 정도 정당한지를 해명하려 한다면, 흔히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자기 연민에 사로 잡혀 있다면 더욱 그렇다. 자기연민이 정당성의 문제와 섞이면 여기서 독선이 나온다.  시기심을 품은 사람은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는 희생자라고 느낀다. 정당성 문제에 대해서는 토론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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