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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심(롤프 하우블 지음,이미옥 옮김)

시기심과 원한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창세기에 나온다. 카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외의 자식으로 두 형제는 너무 상이했으며 직업은 물론 삶의 방식도 달랐다. 카인과 아벨은 낙원에서 살던 세대가 낳은 첫세대이다. 성경에서 인간이라는 종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도 형제의 살인으로!  카인은 땅에서 난 곡식을 야훼께 예물로 드렸고,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배의 기름기를 드렸다. 그런데 야훼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두 형제는 신의 총애를 받기 위해 경쟁했는데 신은 승자만을 칭찬했다. 성경은 누가 왜 어떤 성공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이룬 성공이 가치 있는지를 주제로 삼는게 아니다. 다만 경우에 따라 정당하든 아니든 부당할 수도 있겠지만, 어쨋거나 인간의 삶에는 늘 재산의 불평등한 분배가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 뿐이다. 성경은 재산의 불평등한 분배를 존재의 근본적인 상황으로 소개하고 있고, 사람들은 인간성으로 이를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카인이 분노를 자제하지 못했던 것처럼 만일 폭력으로 실망에 대응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또는 문명화한 기준을 갖추는데 소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인은 아벨을 들로 가자고 꾀어 들로 데리고 나가서 죽였다. 그리고 카인은 에덴의 동쪽 놋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훗날 아내를 맞이하고 에녹이라는 도시를 건설한다. 자제력이 부족했던 탓에 단순한 동기로 동생을 살해한 카인은 이 사건 이후 완전히 변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파괴적인 폭력의 결과로 소중한 것을 배웠고, 폭력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입장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카인은 현대인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카인처럼 자신이 불평등하게 대우받고 있다는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불공평한 대우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자제력이 필요하다. 자기 운명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절대적인 정의가 없을 때 갈피를 못잡을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절대적인 정의가 존재한다는 확신없이 살아야 하고 스스로 길을 찾아야할지 모른다. 즉 불의가 계속 존재하더라도 평화롭게 살수 있는 길 말이다.

 

시기심을 다룬 문학 작품 가운데 허먼 멜빌의 '빌리 버드'가 있다. 멜빌은 빌리를 멋진 선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빌리는 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악에서 스스로 보호하는 방법을 몰랐다. 또한 그토록 덕성스럽기만 하던 자신의 내면에 악이 숨어 있으리라는 사실도 몰랐다. 악은 아름답고 선한 인물에게 적대적인 시기심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많은 피고인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선처를 바란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자신이 시기심을 느끼고 있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사람들은 예외 없이 시기심이란 그야말로 잔인한 범죄보다도 더 저질이라고 느낀다. 상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이해심이 있는 사람이 시기심도 느낄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수 없어 한다. 그러나 시기심은 머릿속이 아니라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 해도 이를 막을 수 없다. 교육을 통해 시기하는 적대심의 형태를 변형시킬 수는 있을지언정 통제할 수는 없다. 순진함이 우리를 보호해주지는 못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제력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서 적대감이라는 감정에 의해서 너무 당황한 나머지 거기에 휩쓸려버린다. 악은 도덕적 행동으로 손을 쓸수 없는 운명적인 힘이다. 착한 성품을 갖지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피할수 없는 인간의 적대감을 의식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물어볼 것도 없고 비탄할 것도 없다. 현실은 그런 것이다.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는 것을 수용하고 그것을 긍정하는 것은 그런 사태를 통제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다. 멜빌의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는 언제라도 악을 예상해야 하는 것과 덕은 보상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말라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모든 형태의 공동체 생활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특히 사람들은 언제라도 폭력을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는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린다. 만일 사람들이 시기심을 의식한다면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긴다.

 

원한은 시기심에 차서 복수를 하려는 태도다. 이는 분노를 억제할 방법이 없어 나타나는 결과이다. 원한을 품은 사람은 자신이 무기력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기보다 더 잘살고 있는 사람에게 분노와 증오를 표출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상대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시기심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원한을 품는자는 여러 측면에서 자신이 무기력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먼저 그는 갈망하는 재산을 자신의 노력으로 획득할 수 없다고 믿는다. 두 번째, 상대에게 드러내놓고 적대적으로 대한다면, 그가 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는다. 세 번째 그는 나쁜 사람들만이 시기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자신의 시기심을 억제한다. 이런 조건에서 그는 시기심과 적대심을 억누르게 되고 이런 감정들은 가면을 쓴 채 표출된다.

 

감정상의 반응을 통해서 시기심은 좀 더 심화되고, 표현하거나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지만, 그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잠게 된다. 만일 시기하는 사람이 상대에게 어떤 식으로 해를 입힐 수 있을지에 전념하게 되면,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런 상상을 생생하게 하면 할수록, 그가 실제로 행동에 옮겨야할 것만 같은 충동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이런 충동을 떨쳐버리기 위해 그는 점점 소극적이 된다. 그러면 자신의 상상은 점차 퇴색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시기심을 품은 사람의 활기는 사라져버린다. 이 때문에 원한을 가진 사람들은 흔히 풀이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뭔가 위험을 무릅쓰려는 시도를 하지 않으면서 시기심에 찬 자신의 적대감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찾게 된다. 니체는 기독교의 탄생을 도덕의 영역에서 일어난 노예들의 폭동으로 서술하고 있다. 원래 기독교를 신봉했던 자들은 낮은 계층의 국민, 로마인들에게 핍박 받던 유대인, 노예, 여자, 기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모든 사람은 로마인들의 삶에 대한 기쁨, 자신감, 현세에 충실한 태도와 권력에 대한 의지를 시기 했을지 모른다. 이들은 다름 아닌 약하고 의지할데 없는 삶을 찬양하고 대신에 로마인들의 활력을 비방함으로써 모든 가치를 전복하려 했던 것이다. 그 리하여 기독교는 이웃에 대한사랑, 동정심, 평화, 겸손과 같은 가치들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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