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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찍 나이들어 버린 너무 늦게 깨달아

부모 와 자식, 기억

부모가 자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공부를 못하든, 범법자가 되든 말썽을 부리는 아이의 부모는 죄의식에 사로잡힌채 스스로를 향해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우리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을까?” 그들은 자식이 삐뚤어진 이유가 자신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아이들의 성공이나 실패가 전적으로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도취적인 생각입니다. 아이들이 성공을 하 든 못하든 간에 그것은 그들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와 행동을 가르치려하지만, 결국 그것을 선택하느냐 못하느냐는 아이들의 몫입니다. 아이들은 집안에서든, 집밖에서든 부모가 생활하는 방식으로 보고 배우게 마련이지만, 그중에서 어떤 것을 배우는지는 아이들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불안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불안을 감지해낸 순간 불안해 하는 법입니다. 아이들은 본래가 자기 중심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확고한 경계와 벌칙을 통해 사회화를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육아는 힘겨루기의 연속입니다. 육아에 관한 많은 견해와 조언은 주로 아이들에게 바른 예의를 가르치고, 아이들을 온순하게 이끌어 주는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지마'라고 하는 엄격한 금지규칙을 정해놓고 어길 때에는 처벌로 강화해야만 이를 억누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다른 방안으로 아이들에게만은 사랑과 보살핌을 주면, 대부분 긍정적인 성인으로 자라난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덜 엄격하고 느긋한 접근 방식은 아이들의 행동을 합리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부모로서 성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자신이 옳다거나, 모든 답을 알고 있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부모에게서 사랑과 존중을 받고 있다고 항상 느끼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단 안전과 통제의 문제에 관한한 경계는 확실히 정해야 합니다. 가정불화와 파괴적인 힘겨루기가 빚어지는 이유의 대부분은 '부모의 과다한 통제, 잘못된 길로 빠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걱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음식이나 방청소 같은 사소한 문제를 두고 지나치게 간섭을 하면 끊임없이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부모들이 아이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두려움을 근거로한 권위로 무작정 밀어붙이려는 태도가 문제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원망과 반항심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느끼는 두려움을 아이들은 느낄 수 없을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부모들의 지나친 안전 의식은 오히려 아이들을 움추려들게 만들고, 비관적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비관적인 젊은이를 만나는 것보다 더 맥이 빠지는 일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삶이나 주변을 돌아보면 절망적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택적인 관심과 집중입니다. 만일 자신에게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일들과 사람들에게 관심과 에너지를 쏟아붙는다면, 조금 더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부모가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든 문제의 해답을 알고 있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안전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지만, 더불어 행복하게 살만한 곳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직접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에게서 아이들이 사랑과 존중을 받고 있음을 항상 느끼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아쉬운 기억일수록 낭만적으로 채색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난 날을 그리워하고 아름답게 채색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하지만 과거의 기억은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려는 노력에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과거를 동경하는 사람들은 현재상황을 과거외 비교하여 미래를 어둡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과거에는 지금보다 물건 값이 덜 비쌌고, 끔찍한 범죄가 지금 처럼 흔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은 보다 친절하고 믿을만 했으며, 인간관계는 지속적이었고, 가정들은 화목했고, 아이들은 공손했습니다. 세상은 사실 어떤 면에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옛날에도 지금처럼 전쟁과 학살이 진행되었으니까요. 질병에 걸려 죽었고, 범죄와 가난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은 그 어떤 역사나 시기에 특별히 고결한 적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과거를 돌아볼 때 마다 현실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젊은 시절의 패기를 다시금 갈구하면서 현재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현실에 짓눌려 몸과 마음은 점점 견디기 힘들어 집니다. 젊은 시절에 대한 선택적 기억은 과거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히게 만들뿐입니다. 이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으려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환상에 매달려서 현재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노력에 금이 갈수 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기억은 과거의 상황과 경험을 있는 그대로 살려내지 못합니다. 우리의 기억은 과거에 대한 왜곡과 아쉬움, 그리고 체워지지 않는 꿈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또렷하게 볼수 없다는 이유로 낭만적인 기억에 매달리는 것은 오늘의 행복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구나 장년기에 들어서면 인생의 목표나 완전한 행복을 달성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듭니다. 이럴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즐기는게 쵝선일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데다 편견도 고정관념도 늘어납니다. 이렇게 안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젊은 시절의 꿈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불투명한 미래를 압도하고도 남을만큼 무한한 가능성으로 차 있던 그 시절을 말입니다. 누구나 다시 그런 날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기억은 현재에 대한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 자체를 기억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과거의 기억에 매달려 현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과거의 기억에 더욱 매달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은 현재 자신이 바라는대로, 원하는 미래의 모습대로 기억을 각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의 행복을 위하여, 그리고 진정한 삶을 위하여 과거의 천국에서 하루속히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의무는 아름다운 노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젊은 시절 고생하면, 노인이 되어 뭔가를 누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기대로 기꺼이 젊은 시절을 희생합니다. 실제로 그 덕에 삶의 여유와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보상입니다. 적잖은 노인들이 그저 순하게 죽을 날이나 기다리며 살면 좋겠다는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별다른 고민없이 노인 전용시설에 격리시키는 것에 찬성합니다. 사회가 암묵적으로 노인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노인은 우리 사회에서 질시가 아닌 천대를 받고 있는 처지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늙는 것을 두려워하고,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혹은 나이보다 젊게 보일까 고민하며 많은 돈을 투자합니다. 노화를 방지하기 위해 쓰는 돈의 액수가 가히 천문학적인 숫자라고 합니다.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성적 매력 상실, 노쇠함, 친구들의 죽음, 기억력 상실 등으로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무 할 일도 없이 노인정이나 공원을 어슬렁거려야 하는 것,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며 하루 하루를 견디는 것, 이것만으로도 힘든 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놓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불만이 쌓일수 밖에 없고, 그래서 입만 열었다하면 불평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노인이 될수록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누구든 우울증에 걸리면 자기중심적으로 되고 화를 잘 내고 함께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우울증은 주위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없는한 결코 나아지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는 노인들의 적절한 치료나 보호, 지속적인 관심과 배려를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노인들은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게 됩니다. 젊은이는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그러나 가능하면 부딪히지 않으려고 애쓰며 지내고 되고 , 이러한 악순환은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노인들은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자신이 살 둥지를 찾아 떠나게 되지요. 텃밭이 달린 시골이나 실버타운, 혹은 맛벌이 하는 자식의 집으로 옮겨 삽니다. 이처럼 자발적으로 자신을 격리시킨 결과 점점 더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일년에 한두 번 찾아오는 자식들의 의무적인 방문을 받으면서 외롭게 늙어 가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치매가 찾아오고 노화는 가속 됩니다.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를 두려워 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지내세요?  '안부 묻기가 겁난다고 합니다. 노환이라는게 완치가 불가능하고, 점점 나빠질 것을 아는데 노인들은 끊임없이 아프다는 소리를 하소연 하니까요.

 

부모의 기대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거나 세월의 허망함을 한탄하는 부모들의 하소연에 언제까지나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노인들이 자식들에게 폐끼치지 말고 노년의 상실감을 품위와 의지로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자녀에게 낙관적인 인생관을 심어주는 것이 부모로서의 의무기 때문입니다. 많은 노인들은 외롭다고 합니다. 가게 점원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노인들의 권익을 대변할만한 스타 모델도 찾아보기 어렵고, 가족들의 방문과 안부전화는 그저 의무적인 행사가 된지 오래고, 사회적으로 아무 쓸모 없는 존재로 취급 받습니다. 아무도 자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노인들이 젊은이들을 붙잡고 장황하고 지루한 대화를 계속하는 것은 자괴감과 소외감에 대한 일종의 보복입니다. 가끔씩 노인들은 ‘니들도 늙어봐라’ 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그야말로 젊은이 위주의 사회에서 노인이 느끼는 난감한 심정에 대한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세상에서 부여받은 마지막 의무가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의연하게 노년의 정신적 신체적 변화를 참고 견디는 일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세월 앞에 속수무책으로 허물러지면서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용기라는 덕목이 젊은이들에게 똑같이 분배되지 않는 것처럼, 모든 노인들에게 그런 의연한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의연함이 있는 노인을 존경합니다. 당면한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마지막으로 용감해질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요? 요즘 시대가 주로 젊은 세대 위주로 흘러가다 보니 상대적으로 노년층이 푸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노인들이 쌓아올린 경험과 능력을 무시해 버리고, 그들이 어렵게 얻은 지혜도 부정해 버립니다. 인간이기에 누구나 노년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도, 아직 닥쳐오지 않은 현실이기에 노년은 먼나라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젊은이들을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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