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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 다섯 가지(오츠 슈

치료의 의미, 신의 가르침

 스물네번째 치료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했더라면.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이다. 치료라는 행위가 바로 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난 만큼 떠나보내야 하는 가족의 슬픔도 떠나야 하는 환자의 후회도 한결 가벼워졌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치료의 의미는 무엇일까?  질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되찾는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의술의 힘으로는 역부족인 병이 있는데 이를 때 치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불치병을 치료하는 목적은 병이 더 이상 악화되지 못하도록 막는데 있다. 환자 입장에서 완치가 어려운 병에 걸렸을 때 가장 가치를 두어야 할 인생목적은 무엇일까? 단순히 병마의 세력확장을 막는데 있을까? 물론 병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게 막는 치료는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환자와 의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어느 정도 선에서 마음을 접고, 남은 생을 보다 알차게 꾸려나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쪽이 한정된 시간을 가장 보람있게 보내는 최선의 방법이다.

 

목숨을 이어가는 연명이 삶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물론 사람은 죽음 앞에 서면 누구나 생명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하지만 단순히 오래 사는 일, 목숨을 부지하는 일만이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 빨리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불치병에 걸렸을 때 단순히 살아있는 시간을 일초라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시술하는 치료는 상상 이상의 고통을 동반한다. 어쩌면 남은 시간의 대부분을 치료에 빼앗길 수도 있다. 특히 말기 암에서 암세포가 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했다면 항암제가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가 있다. 항암 치료 뿐아니라 말기 환자를 위협하는 치료는 너무나 많다. 더구나 건강한 사람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수액과 수혈이 환자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항암제로 다스리기 어려운 말기암의 치료 목적은 시간 확보와 아울러 질병에서 비롯된 통증과 항암제 부작용을 덜어주는 것이다. 완치가 어렵다면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환자 본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고, 또 그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 치료의 진정한 목적일 것이다.

 

말기 치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마무리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근본적으로 의료와 의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보다 더 풍요로운 인생을 꾸려나가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의료의 진정한 목적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생명을 연장하는 연명치료와 생명의 질을 확보하면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완화의료는 공존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것이 현대 의학의 한계다.  게다가 연명치료를 고집하는 동안 삶의 질은 어두운 나락으로 곤두박질 칠 수 있다.

 

스물다섯 번째 신의 가르침을 알았더라면. 내세를 믿으면 좋은 점은 이 세상의 이별은 일시적이라는 것,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안을 받는다는 점이다. 살아있는 의미를 찾지 못하고, 영혼의 고통을 느끼는 이유를 세가지로 구분 할 수 있다. 죽음을 초월한 미래에 대한 확신과 신뢰할 수 있는 가족 , 친구와 의료인의 존재 그리고 스스로 결정 할 수 있는 자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가지 가운데 한가지 이상의 요소가 흔들리면 영적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많이 갖고 많이 누렸던 사람은 그만큼 잃는 것도 많아서,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수록 무언가에 매달리고 싶은지도 모른다. 평생 아쉬울 게 없었던 인생이기에 마지막까지 인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죽음의 사신이 찾아왔을 때의 불안은 누구나 견디기 힘들 만큼 엄청나다. 이를 대비해 건강할 때 종교를 공부하고 나름의 종교관을 확립한다면, 보다 편안한 죽음의 순간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은 모두 허황된 것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종교에 관심을 가진다면, 생각지도 못했던 발견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이 찾던 인생의 진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인간의 고뇌와 의문이 모두 하나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허무하고 건조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치유될지도 모른다.

 

 꽃잎이 하늘하늘 춤을 춘다.

지는 꽃에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사람들은

저마다 갈 길을 재촉한다.

기척없이 내리는 봄비가 세상을 적시고

연약한 벚꽃은 가는 빗줄기에 뿔뿔히 흩어져 허공에 날린다.

 

꼬박 일년을 기다렸다.

꽃이 피기를 .

그러나 언제 피었나 싶더니

순식간에 벚꽃은 저 멀리 사라지고 만다.

꽃이 만발했을 때가 바로 꽃이 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 후회는 없을까?

절정과 동시에 세상에서 사라질 때 미련은 없을까?

 

봄날 아침 앞 마당에는 산화한 꽃들이

마지막 흔적을 새기고 있다.

남은 꽃잎도 먼저 떠난 이의 뒤를 쫓아

잠시 허공을 여행하다가 이내 땅바닥에 떨어진다.

현관으로 이어지는 돌담은 하얀 화강암이 아닌

엷은 분홍 꽃잎으로 뒤덮혀 있다.

그렇게 모두가 떠나고 홀로 남은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떠나가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후회는 없을까?“

 

그렇게 산화한 꽃잎에서

후회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흔히들 한 순간이라고 너털 웃음을 짓는

인간의 일생과 비교하면,

정말 찰나를 살다간 그들이지만

슬픔이나 미련은 없는 것 같다.

 

어떻게 아무 미련도 없이 떠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건 살아있는 동안 ,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리라 .

시간에 관계없이 꽃을 피운다는 소명을

완전히 이루었기 때문이리라.

 

인간은 어떠한가?

 

사람도 하루하루 생명을 부지하기 힘든 시기가 있었다.

옛 사람들은 순간에 지는 벚꽃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곤 했다.

먼저 떠나는 벚꽃과 그 뒤를 따라 떨어질 벚꽃,

현대의학은 인간과 죽음을 조금 멀리 떨어뜨려 놓았지만,

자연은 변함없는 진실을 우리에게 속삭인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주어진 시간을 열심히 살아내려는 생명은

후회하지 않는다‘ 라고.

그 진리를 깨친 벚꽃은 미련없이 떠났다.

당당한 벚꽃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후회없는 시간을 보내기를 기도한다.

 

이 세상을 떠나야할 때 사람들은 반드시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본다.

자신의 역사이자 자신을 대변하는 인생길이 충분히 만족스럽다면

미소를 머금으면서 다음 세상으로 향할 수 있으리라.

 

눈부시게 발달한 의학기술로 육체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마무리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

인생이라는 선생은 절대로 호락호락 넘어가는 법이 없다.

한 사람의 일생을 점검하면서 마지막 숙제를 부과하는 것이다.

그 마지막 과제를 앞에 두고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

무사히 완성한 사람도 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해결하지 못한 숙제 때문에

괴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렇게

마지막 숙제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싶다.

 이것은 내 권한 밖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각자 인생의 소유자인 개개인이

마지막 과제를 의식하고 하루를 살지 않으면

아파하는 그들에게 나는 아무런 약도 처방할 수 없다.

약은 커녕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흘리는 눈물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람들은 떠날 때 특별히 후회나 거창한 과업 때문에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바쁜 일상에서 잊고 살았던 아주 작은 삶의 진실 때문에 아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