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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 콤플렉스(듀크 로빈슨)

Complex 9 아픔을 감싸주려 한다.

슬픔이란 일이 잘못되거나 우리를 위협할 때 느끼게 되는 고통스런 반응이다. 가족과 사별하거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거나, 좋은 직장을 잃거나, 남에게 거절을 당했을 때 인간은 슬픔에 빠진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뜻대로 풀리지 않아 고통이 몸에 베어들면 인생은 슬픔의 파노라마가 된다. 착한 사람은 품성 탓에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는가하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많고, 도움은 커녕 상대 속을 뒤집어 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착한 사람은 더 많이 슬프한다. 슬픔을 이길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은 없으며 가정 환경과 문화적 관행에 따라 슬픔의 방식도 다르다. 슬픔은 불행한 현실과 마주쳤을 때 고통이 진행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슬픔의 정서적 단계

1단계: 부정 , 그럴 리가 없어!

2단계: 분노 , 정말 어이가 없어!

3단계: 협상, 그가 회복된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4단계: 우울, 살아봤자 소용없어.

5단계: 체념, 견딜수 있을 거야.

 

누군가 사별의 아픔으로 신음하고 있다면,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보호만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회복 속도도 떨어뜨린다. 보호전략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우리 대부분은 유족과 대면할 때 강한 면모를 보이려고 노력한다. '아는 척한다'는 것이다.

*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다. 침묵으로 상황을 잠시나마 회피할 수는 있겠지만, 슬픔이 계속 지연되기 쉬우므로   유족이 오랫동안 아픔을 겪을 수도 있다.

* 잡담을 늘어놓는 것이다. 이는 상대의 주의를 다른대로 돌리는 전략이다. 좋은 사람들은 마음이 편치않거나   딱히 할 말이 없으면 가벼운 잡담을 물꼬를 튼다. 하지만 처음부터 핵심을 벗어난 잡담을 늘어 놓으면, 그들이   마음껏 통곡하고 애통해야 할 시간을 빼앗는 것이다.

* 완곡어법을 사용한다. 고인에 대한 무례한 언동은 자제해야한다.

* 무조간 격려한다. 유족들이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기를 바라면 '큰 고통없이 돌아가셔서 다행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을 깍아내리는 탓에 상대를 마음껏 울지도 못하게 만든다.

* 조언하는 것이다. 조언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상대방을 마음껏 조종하려는 태도가 될 수도 있고, 잘못된 조언은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망각하거나 엉뚱한 죄책감을 심어줄 수도 있다.

* 상투적인 말을 구사한다. 고인이 좋은 곳을 갔다고 믿읍시다. 애통할만하니까 하는 것이다.   상실감을 덜 느끼도록 주의를 분산시키지만 조심해야 한다.

* 도움이 필요하면 주저없이 연락해라. 나중에 들어줄 수 없으면 상대방이 더큰 시름에 잠길 수 있다.

 

어쨌든 유족을 '보호하려는 전략'은 효과가 없다. 그렇다면 보호전략을 구사하지 않을 경우 과연 유족을 어떻게 위로해야할까? 사회적 통념과는 달리 가슴을 찢는 듯한 깊은 슬픔과 상처는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시간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지만, 마음껏 울고 가슴 아파하는 편이 낫다. 부서진 삶의 조각을 끼워맞추고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려면, 죽음을 애도하고 고통을 감내하며 스스로 적응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곁에 있어주는 것이 진정한 도움이다. 우선 '함께 한다'는 것은 정서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직접 찾아가는 것이다. 물론 언제 도움이 필요한지 알수 없고, 그 옆에 늘 붙어있을 수 없기에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함께 한다'는 말은 자신의 욕구보다 유족의 필요를 채운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함께 한다'는 말은 유족을 슈퍼맨이 아닌 당신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낄수 있는 평범한 인간으로 대한다는 뜻이다. 문제의 해답을 전부 아는 것처럼 으스대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두려움이 드러날까봐 노심초사하는 사람들보다는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자신도 쉽게 상처 받을 수 있는 친구라는 점을 밝혀야할 것이다. 그들을 위로하려면 약점을 보일 때 비로소 강자가 된다.

 

함께 하는 것은 조용히 그들과 고통을 나눈다는 뜻이기도 하다.  침묵이 흐르면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재확인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따라서 말수는 적을수록 좋다. 어차피 충격에 빠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듣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의 말을 무시하거나 실의에 빠진 마음을 가엽게 여기라는 뜻은 아니다.  조용한 분위기를 잡담으로 채우지 말라는 것이다. 어색하긴 하지만 침묵을 지킬때 전달되는 메시지가 더 강하게 작용한다. 같은 일을 겪더라도 사람들마다 아픔을 받아들이고, 슬픔을 나타내는 과정은 다르며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시간과 방법 역시 제각기 다르다. 일정기간 내에 슬픔을 극복하기를 강요하기보다는 마음에 여유를 갖게 하고, 인내력을 발휘해 상대방을 보살핀다면 마음을 추스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가족과 사별한 사람들은 고인의 존재를 쉽사리 잊지 못한다. 휴가를 떠난 사람처럼 고인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그를 회상하고 함께 했던 추억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유도해야 한다.

 

실의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 상황에 적절한 스킨쉽으로 유대감을 조성하라.

* 상대의 아픔을 통감하라.

* 당장 보탬이 될만한 일을하라.

*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라.

* 기분전환을 위해 적절한 선물을 제공하라.

* 상대방이 원하면 종교적 메시지를 함께 나눠라.

* 각자의 속도에 맞춰 감정을 추스르게 하라.

 

좋은 사람은 자녀를 과잉보호 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망소식을 깨낼 때 자녀들은 나가있으라고 한다.  아이들이 충격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쩔수 없이 일러주어야 할 때 완곡어법을 사용하며 혹은 하느님을 아빠를 무척 사랑하셔서 하늘나라로 데려가신거야 라는 뻔한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은 오히려 혼란에 빠진다. 주변사람과 냉엄한 현실과 아이와의 거리감은 점차 커질 것이다. 가족의 죽음에 대해 간결하게 사실 그대로를 직접 이야기하고, 어린아이에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풀어서 설명해야 한다. 아이들의 경우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혼란스런 충격과 고통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이때 사실을 반복해서 말해줘야 한다. 또한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고, 궁금한 것은 바로 물어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잉보호는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대신 아이 곁에서 자기 나름대로 슬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도와주어야 한다. 물론 슬픔을 표출하는 속도와 방법이 보통과는 다른 아이가 있는가 하며, 누군가 옆에 붙어 있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아이도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아이도 슬픈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이는 때와 관계없이 가동되는 방어기제이다.

 

가족의 죽음을 목격한 아이를 위로하고 싶다면 사실만 간략히 말하고, 마음이 풀릴 수 있도록 귀를 열어두어야 한다.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것 같다면 그를 안심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두 달이 지나도록 감정상의 변화가 없거나 계속 우울해 보인다면 전문의를 찾는 편이 낫다. 아이들도 극복 할 수 있다. 어른처럼 말이다.  보호자가 고인이 되었다면 아이가 감정을 추스러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상실의 아픔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래야 감정을 억지로 감춰 건강을 해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향후 어떤 일이 닥쳐도 끗꿋이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과잉보호는 아이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일 홀로 있는 사람에게 비보를 전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인 소식을 때는 전화보다는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편이 낫다. 몇 분만 같이 있으면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느낌이 올 것이다. 하지만  '유족에게 괜한 말을 하는 건 아닐까? '하생각에 침묵하고 싶더라도 함구하고 있으면 곤란하다. 일단 서로 알고 있는바가 일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사실을 일일이 강조할 필요는 없다.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일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는 수 밖에 없다.

 

생명을 연장해야 할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지를 놓고 담당 의사와 옥신각신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치료를 계속해야  호전되지 않을 것이니 포기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어렵다. 그렇게 애간장 녹이면서 기다리다 보면 환자는 차츰 살아야 할 이유와 삶에 대한 의지마저 잃어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간에 유족은 위안을 받아 마땅하다. 임종 직전까지 가슴 아파하며 기다렸다가, 힘든 결정을 내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수 없으며 설령 그럴수 있다 하여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무조건 상대방을 보호하려고 하기보다는 함께 있어주고 당장의 필요를 채워준다면, 그들은 위로를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