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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테크 성공학(김정운)

여가 문화의 부재 무엇이 문제인가?

'제대로 노는 것'이란 혼자 놀아도 너무 재미있어 심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논다는 것은 돈과 시간을 들여 깜짝 놀랄만큼 대단하게 놀아야 한다는 또는 일상적인 것에서 벗어나 특별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환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진짜 재미는 나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는 일상 속에 있다. 혼자 있어도 좋고 둘이 있어도 어색하지 않는 것, 이것이 놀이의 시작이고 핵심이다. 폭탄주를 왜 마실까?  물론 빨리 취하기 위해서이다. 그럼 왜 빨리 취하려고 할까? 포도주는 누군가와 함께 나눌 이야기가 풍부해야만 같이 마실 수 있다.  하지만 한국 남성들에겐 긴 시간 공감하면서 나눌 이야기가 없다. 포도주 한 잔을 앞에 놓고 맨 정신으로 서로를 마주 보는 건 고민스런 일이다. 차라리 폭탄주를 마셔 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낫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아내가 묻기 전에 먼저 말을 하지 않는다. 기껏 물으면 대답은 하지만 눈을 마주 치지는 않는다. 아내가 차려준 밥상에서도 남편의 눈길은 신문에 가 있다. 아내가 묻는 말에 물론 꼬박꼬박 대답은 한다. 식사후 소파의 거실에서도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남편의 눈은 TV에 고정되어 있다. 다른 사람과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살아가는 이 땅의 중장년 남자들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심지어 외식자리에서도 남편은 외친다. '아줌마 여기 빨리 줘요' 남편은 주문 후 음식이 나올 때까지의 짧은 시간에도 불편한 것이다. 왜? 아내와 마주봐야 하니까.

 

엘리아스라는 독일 사회학자는 '문명이란 공격적 본능이 온순화된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눈길이 우연히 마주칠 때 평화스런 웃음으로 이어지는 사회는 문명화된 사회다. 반면 서로 마주치는 눈길이 적의찬 사회는 아직 문명화가 덜 된 사회라 할 수 있다. 상대방의 아무 의미없는 눈길을 적대적으로 해석하고, 공격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이 땅의 남자들은 여전히 미개하다.  단순히 미개하다면 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을 것이다. 미개하면 미개한대로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미개할 뿐만 아니라, 아주 심각한 정신병리학적 질환을 앓고 있다. 바로 자폐증이다. 자폐증이란 도대체 남과 대화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심각한 증세다. 증상은 다양하지만 자폐증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반응이 있다. 절대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눈 마주치기'는 관심을 공유하려는 행동인 데 눈을 마주치지 않으니 어떤 일이 일어날리가 만무하다.  눈 마주치기가 무서워 폭탄주를 돌려야 하는 한국 남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서로 어울려 술 마시고 어깨동무하고 노래하지만, 실은 각기 다른 세계에 외롭게 머물러 있을 뿐이다.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눈 맞추기는 소통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동물적인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 뿐이다. 눈을 마주치고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타인과 관심을 공유하려는 행위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인간적인 행위다.

 

변형된 자폐질환을 가지고 있는 한국 남성들에게 나타나는 또하나의 증상은 '독수리 5형제 증후군'이다. 독수리5형제 신화는 지금도 중년 사내들이 모여 한잔 걸치는 곳이면 어디든 어김없이 재현된다. 그곳이 포장마차든 룸싸롱이든 동네 호프집이든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전 지구적인 환경문제부터 한국의 교육정책, 재벌개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우주의 침략자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술이라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곳이면 된다. 변신을 위한 필수 에너지, 즉 알코올이 어느 정도 체내에 축적되면  드디어 낡고 초라한 옷을 벗고  화려한 변신을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지구를 지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침을 튀기가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에게 정치권의 모든 유명인사는 친구의 사촌이며 친척의 사돈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술이 깨면서 각자의 독수리 5형제는 다시 일상의 중년으로 돌아온다. 무기력한 발걸음과 처진 어깨 그대로...

 

술을 먹으면 세상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손에 쥔듯 호기를 부리는 중년남자들의 허세는 자신들의 뿌리깊은 불안에 대한 방어기제에 불과하다. 이땅의 중년남자들에게 세 가지 자부심이 있다. 생산인 으로서의 자부심, 가장으로서의 자부심, 수컷이라는 자부심, 하지만 직장에서는 명퇴 당하고 가장의 권위는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지 오래다. 밤이 무서워지는 중년의 수컷은 아내의 예쁜 잠옷이 되레 부담스럽기까지하다. 자신의 존재 기반이 되어왔던 이 모든 자부심이 사라진 후, 중년남성들에게 마지막 남은 방법은 이 나라를 지키고, 지구를 지키고 인류를 구원해야 하는 독수리 5형제로의 변신이다. 우리는 그 동안 쉼 없이 달리기만 했다. 달리다 지치면 가끔 알코올 힘을 빌려 허세나 부릴뿐 진정한 휴식을 갖지 못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더 이상 실패와 절망에 몸을 맡기기 싫다면 이제라도주변을 살펴보자. 눈을 맞추면 정답게 대화할 수 있는 말이 통하는 상대가 몇이나 있는지, 또 나는 누구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있는지 말이다.